푸틴이냐, 시장이냐… 기로에 선 러 재벌

입력 2018-04-13 05:00

올리가르히, 美 추가 제재로 자산동결되고 거래도 제한
푸틴 “자산 들여와라” 압박… 원자재 수출하는 러 재벌들 고립되면 생존 어려워 고민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들은 앞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영국령 버지니아제도 대신 춥고 바람 부는 극동지역 외딴섬으로 탈세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한 주 동안 러시아에선 ‘대안 조세피난처 후보지’가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이 새로운 경제제재안을 발표한 이후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궁)이 보인 반응은 고작 자국에 조세피난처를 만들어보자는 것뿐이었다”면서 루블화가 급락하고 주가가 요동치는데도 러시아 정부가 해결책을 찾지 못해 불안감만 더하고 있다고 11일(현지시간) 전했다.

미국이 지난 6일 발표한 러시아 추가 제재 명단에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업체인 루살의 올렉 데리파스카 회장을 비롯해 올리가르히 24명과 기업 14곳이 포함돼 있다.

명단에 오른 개인과 기업은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기업과의 거래가 금지된다. 영국에서 발생한 전 러시아 스파이 암살기도 사건과 시리아 화학무기 공격의 배후로 러시아가 지목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서방 국가들도 여기에 동참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 재무부는 이미 영국은행에 제재 대상에 오른 24명의 러시아인과 거래를 계속할 경우 ‘커다란 벌칙’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런던에 있는 올리가르히들에게도 파장이 예상된다.

기업의 발이 묶이고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올리가르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힘과 글로벌 시장의 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의 제재는 세계에 흩어져 있던 러시아 자산을 국내로 모아 푸틴의 감시 아래 두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러시아 정부는 계속해서 올리가르히들에게 자산을 국내로 가져오도록 압박해 왔다. 푸틴 정권의 군사 조직이나 대외공작을 금전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를 받았던 올리가르히들은 이번에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산을 국내로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에 불과한 러시아의 작은 시장이 그들에게 매력이 있을 리 없다.

경제학자인 블라디슬라프 추코프비치는 “사람들이 이번 제재를 농담처럼 받아들이지만 상황은 이전 경제제재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재야 경제전문가 에프게니 곤트마케르는 “이번 제재는 거대한 수출 위주 원자재 기업들의 고립을 목표로 하는 고통스러운 제재”라며 “러시아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전략이 서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데리파스카 회장이 소유한 기업들은 제재 발표 이후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이미 60억 달러(약 6조4146억원) 이상의 손해를 입었고 주가는 반 토막 났다. 루살의 러시아 내 직원 수는 6만명에 달한다.

NYT는 “미국의 제재는 올리가르히의 자본을 러시아로 가져오라는 푸틴의 캠페인에 오히려 도움을 주는 꼴”이라며 “러시아 경제를 약화시키려면 러시아 재벌들을 제재하기보다 서방으로 유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