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무게 받친 폐침목 이용 단순·비장한 ‘서 있는 사람’ 2016∼2017년 佛서도 인기
폐자재 활용한 31점 선보여… 작품마다 에너지 느껴져
프랑스 파리 루브르궁 북쪽에 인접한 건축물인 팔레 루아얄. 루이 14세가 유소년기에 머물렀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정원에서 지난 2016∼2017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한국 중견 조각가 정현(63)의 조각전이 열렸다. 가로수 사이에 도열한 ‘서 있는 사람’은 파리 시민들에게 감동을 남겼다. 2개월 반으로 예정됐던 전시가 장소를 옮기며 9개월 동안 연장 전시될 정도였다.
파리를 먼저 울린 정현의 ‘침목 인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한국 관객에게 인사한다. 내달 22일까지 열리는 기획 초대전 ‘정현’ 전을 통해서다.
정 작가는 석탄 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 등 산업폐기물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용도 폐기된 폐한옥의 건축 자재를 재료 삼아 조각 작업을 한다. 철길의 침목은 파리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 시도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들려줬다.
“기찻길 건널목은 놀이터였어요. 이따금 상상초월의 화물 기차가 지나가곤 했죠. 몸이 땅 속으로 갑자기 푹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을 준 화물칸에는 장갑차, 탱크 같은 게 실려 있곤 했어요.”
기차의 무게, 삶의 무게,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낸 선로 밑에 깔린 침목. 덜커덩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갈에 찍혀 곰보 자국처럼 우둘투둘해진 침목. 너트나 이음새도 그대로 있다. 그런 거친 미감의 침목을 가지고 서 있는 인간 형상을 만들었다. 침목 서너 개를 이어붙여 만든 아주 단순한 구조. 그래서 비장함이 있다.
작가는 “조각은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한다”며 “혹독한 시련을 견딘 침목의 자질에 감동 받아 재료로 썼다”고 말했다.
사람과 화물, 그리고 분단의 상처까지 안고 달렸을 기차의 무게를 감내한 침목은 전후 산업 사회를 이끈 50∼60대 한국 사회 아버지들의 초상이다. 유럽인들에게는 달리 해석되며 감동을 남겼다. 유력 일간지 르몽드, 르 파리지엥은 이례적으로 박스 기사로 리뷰를 실었다.
“테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낀 파리 시민들에게 제 작품은 침묵의 저항처럼 읽혀졌던 거 같아요.”
이번 전시에는 ‘서 있는 사람’ 조각과 함께 새롭게 시도한 설치 조각과 드로잉 등 입체 9점, 평면 22점이 나왔다. 금호미술관에서는 2001년 이후 17년 만의 개인전이다.
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가옥을 떠받쳤던 대들보가 거대한 구렁이처럼 누워있다. 한때는 육중한 천장을 떠받쳐온 대들보지만 이제는 좀이 먹어 수명을 다했다. 나무 표면은 바스라질 것 같다. 이 대들보를 보며 옆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으나 구조조정 당한 산업 사회 역군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대들보를 얻어와 작업실에 두고 1년간 온갖 시도를 했다”는 작가가 마침내 완성시킨 작품은 어떤 모양일까. 가로로 놓인 누런 대들보 위에 먹칠을 한 검은 침목 조각 3개를 수직으로 세웠다. 새로운 싹이 솟는 것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정현의 작업에서 한결같이 감지되는 것은 에너지다. 일어서겠다는 의지다. 폐한옥 자재에 먹을 칠해 원형의 구조물을 성처럼 쌓기도 하고, 선로처럼 깔아 놓아 다시 달리고 싶은 욕망을 뿜어내기도 한다.
콜타르 드로잉, 자투리 침목 조각을 가지고 만든 오브제 회화 등 폐자재를 이용한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작가는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고 2014년 김세중 조각상을 받았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파리가 감동한 정현의 조각… “시련 견뎌낸 우리네 아버지 초상”
입력 2018-04-13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