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앞둔 장애인 목사 이야기] 장은도 목사, 플루트 들게 하신 주님 위해 연주

입력 2018-04-13 00:01
장은도 목사가 지난해 12월 경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장은도 목사 제공
지난 1월 휠체어에 앉아 플루트를 쥔 채 프로필 촬영을 하고 있는 장 목사. 장은도 목사 제공
“제가 만약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또 만약 목회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 끝은 분명 지옥이었을 겁니다. 제 손에 들린 플루트도 결국 놓쳐버렸겠지요.”

지난 5일 경기도 수원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장은도(52) 목사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자 플루티스트로서의 삶을 이렇게 소개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음악예술사립대(플루트 전공) 최초의 장애인 플루티스트 졸업생인 그는 세 살 때 푹 주저앉고 말았다.

명의를 찾아다녀 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아홉 살 땐 1년 동안 4차례나 수술대에 오르며 틀어진 뼈에 핀을 박고 좁아진 골반을 넓혀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급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50년째 살고 있다. 장 목사는 “어머니는 매일 내게 ‘고생할 팔자’라고 푸념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그 모든 팔자가 복의 근원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복의 근원’을 마주하게 된 건 고1 때였다. 하굣길에 우연히 가방을 들어준 한 선배를 따라 교회에 가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교회는 플루트와 인연을 맺게 해줬다. 20대엔 주일 오후마다 김포와 강화 지역의 작은 교회를 돌며 찬양단과 관현악단을 가르치는 데 오롯이 바쳤다.

신앙 공동체를 섬긴 봉사의 보상은 꿈에 그리던 유학으로 돌아왔다. 청년 시절 멘토가 돼줬던 교수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여행을 가게 됐는데 교수가 미리 비엔나음악예술사립대의 특별 오디션을 준비해 둔 것. 하늘길 8000㎞를 목발과 함께 날아온 동양 청년에게 벽안의 교수들은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는 대학(4년), 대학원(4년), 최고연주자과정(2년)을 6년 만에 마쳤다. 금의환향한 그에게 수많은 곳에서 출강을 요청해 왔다. 부와 명성도 따라왔다. 하지만 능력과 재물이 주어지는 사이 마음속엔 교만이 가득 들어찼다. 장 목사는 “몸과 마음을 세상에 빠뜨린 채 하루하루 우상을 따라다니던 나날들”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시련이 찾아왔다. 두 채의 집과 두둑한 통장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았다.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지며 장애로 인한 합병증이 도졌다. “갖은 핑계로 신학 공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게 떠올랐습니다. 그제야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신학 공부는 신앙의 초심을 찾게 해줬다. 음악적 재능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아끼는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플루트 앙상블을 만들었다. 연주집회를 하며 복음을 전했다. 양로원 어르신들과 홀몸 노인들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나눔 활동이 알려지며 2013년엔 장애인 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을 받는 영예도 안았다.

고난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특별했다. “자신의 삶이 짙은 어둠 같은 퍼즐 조각뿐인 것 같나요. 아마 모든 조각이 맞춰진 것을 보면 어두운 부분이 그림을 아름답게 해주는 명암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겁니다.”

수원=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