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많은 대통령들이 책임총리를 말했다. 물론 제대로 작동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책임총리는 일종의 레토릭에 가까운 단어였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 녹아 있는 단어였다. 사실 총리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는 조금 이질적인 존재다. 헌법만 보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통령 권한대행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대로 대행하지 못했다. 고건 총리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2개월 동안 권한대행 직을 맡았다. 당시 고 총리는 권한대행 직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무회의는 물론이고, 청와대 참모회의까지 주재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권한대행은 소극적 권한대행이지 적극적 권한대행이 아니다”라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비판이었다(고건 회고록).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 참모진의 견제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황교안 총리는 2016∼2017년 박근혜정부 마지막 5개월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보냈다. 황 권한대행은 떠나는 날 “중압감에 밤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고 했는데, 그가 야당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은 “제발 아무 것도 하지마라”는 것이었다.
책임총리제가 다시 정치권에서 거론된다. 대통령 개헌안과 자유한국당 개헌안의 핵심 쟁점이다. 대통령 개헌안에도 책임총리 언급이 등장한다. ‘국무총리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책임총리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데에 있어 대통령의 명을 받도록 하는 부분을 삭제함’이라는 설명이다. 대통령 개헌안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존 헌법에 있던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라는 문구가 빠진 것이다. 한국당 책임총리제의 핵심은 국회 선출이다.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해 내치에 대한 행정권을 맡기고, 대통령은 외교·안보·국방과 같은 외치를 담당하게 하자는 게 골자다. 다만 한국당 개헌안은 대략적인 방향만 나온 것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국회에서 선출한 총리의 해임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불명확하고, 총리가 내치를 담당할 방법론에 대한 얼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 국회 선출제는 여야가 진지하게 논의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권위를 총리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국회에서 선출된 책임총리는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권위가 생긴다. 국회에서 선출된 총리를 대통령과 참모들이 무시하기 쉽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는 박 전 대통령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권력 내부에 박 전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을 견제할 구조나 장치가 전무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권력의 입장에서도 책임총리라는 완충장치는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책임총리가 대통령과 충돌하며 국정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는 과장일 수 있다. 책임총리의 권한을 어느 선으로 정할지 여야가 합의하면 된다. 대통령의 가장 큰 권한인 인사권은 보장하되, 책임총리에게 일정 정도의 견제권을 보장하는 방식이면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까. 야당이 민감해하는 권력기관장 인선에 총리의 비토권을 명문화한다든지, 대법관추천위원 지명권 등 일부 인사권을 총리에게 나눠주는 것도 고민해볼 대목이다. 개헌 논의에 참여해온 여권 중진 의원은 “총리 선출제는 협상 카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여권도 양보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의미다. 현재도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임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된다. 개헌 논의의 틀도 마련됐고, 합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시간이 별로 없다. 게다가 야당은 개헌할 생각이 별로 없고, 대통령은 야당을 설득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6월 개헌이 점점 멀어져 간다.
남도영 정치부장 dynam@kmib.co.kr
[돋을새김-남도영] NO라고 말할 수 있는 책임총리
입력 2018-04-10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