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양심과 앙심

입력 2018-04-10 00:00

우리 마음속엔 두 개의 마음이 숨어 있다. 양심과 앙심이다. 양심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착한 마음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며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기능해 주는 것이다. 타락으로 파괴돼 처음처럼 온전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서 기능하여 옳은 방향을 가르쳐준다.

양심이라는 뜻의 헬라어 ‘수네이데시스(Suneidesis)’는 ‘함께(Sun)’와 ‘알다(Oida)’의 합성어로 ‘함께 알다’라는 뜻이다. 영어로 ‘양심(Conscience)’도 어원적으로 ‘무엇과 함께 안다’는 뜻이다. 양심은 우리가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내적 지식인 것이다.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은 양심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으로 형상화했다. 나쁜 짓을 하면 가슴이 떨리고 불편한 것은 삼각형의 모서리가 심장 벽을 마구 찔러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양심에 반하는 일을 반복하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어지고, 심장 벽에도 굳은살이 생겨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어린아이의 양심은 삼각형으로, 어른의 양심은 원형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참된 믿음은 선한 양심을 따라 살게 한다(딤전 1:19). 믿음 없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선한 양심 없는 믿음은 유지될 수 없다. 선한 양심이란 한 번도 죄지은 적 없는 마음이 아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경험하고 중생한 양심이다.

예수님은 양심이 우리의 눈과 같다고 하셨다. 눈은 빛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빛은 눈을 통해 들어온다. 양심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도구가 된다. 동화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는 늘 입바른 소리를 하는 귀뚜라미를 귀찮게 여기고 발로 밟아 죽여 버린다. 그런데 귀뚜라미는 유령이 되어 나타나 ‘착하게 살라’고 끝없이 채근한다.

작가는 “양심의 소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양심을 귀뚜라미에 빗댄 것이다. 양심의 소리는 귀뚜라미의 작은 울음소리처럼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양심의 소리는 늘 성령 안에 거할 때 점점 더 크게 들린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속 양심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반면 앙심은 죄로 말미암아 생긴 악한 마음이다. 분노를 일으키고 복수하게 하며 사탄의 도구가 되게 하는 마음이다. 때로 앙심은 정의의 모습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 ‘양심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일이 불만에서 비롯된 ‘앙심선언’일 때가 있다. 때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고 격분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

신약에 양심이라는 단어가 32번 나오는데 그중 21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했다. 그는 양심의 사람이다. 양심은 수천 수만명의 증인과 같으며 아무것도 두렵게 하지 않는 좋은 친구와 같다. 훈련된 양심은 가장 좋은 친구의 역할을 한다. 선한 양심은 바울처럼 모든 과정에서, 때로 억울한 상황에도 담대하고 진실하게 하며 보복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을 만난 총독 벨릭스는 양심이 살아나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으나 앙심 때문에 양심이 매몰돼 버렸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세 번이나 확언하고도 유대인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양심을 내버리고 앙심을 따랐다.

‘선한 양심’을 따르지 않으면 양심이 점점 약해져 ‘연약한 양심’이 되고, 이는 곧 ‘화인 맞은 양심’이 된다. ‘화인 맞은 양심’의 동의어가 ‘앙심’이다. 악을 행하면서도 담대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선을 악이라 해도 전혀 거리낌 없다.

참된 믿음의 삶이란 선한 양심을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는 삶이다. 선한 양심이 최종 판단을 내리도록 하려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경험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양심이 살아나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로 양심을 따르는 담대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히 9:14).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엄청난 핍박과 방해에도 종교개혁을 이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의 증거가 없고 내가 인용한 성경에 잘못된 것이 없다면, 또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나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주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전기에 나오는 고백이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종교개혁가 루터처럼 믿음과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아갈 때 담대함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악한 앙심을 내려놓고 양심의 소리를 크게 듣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재훈(온누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