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보다 복지·휴가 등 꼽아 원하는 일 하며 여가 우선시 생각만큼 눈높이 높지 않아
정부 정책 방향과 시각차 돈이면 된다는 건 착각 청년실업 대책 손질 불가피
‘배가 불렀다. 중소기업에 빈 일자리가 20만개나 된다.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이다. 정부가 최근 중소기업 신입직원이 3년간 600만원을 내면 나머지를 지원해 3000만원을 만들어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자리 대책을 내놓은 것도 이런 시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과연 그럴까.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져봤다. 결과는 청년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는 높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이 아니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직장이었다. 그들은 외친다. 소박하기만 한 우리의 눈높이를 탓하지 말고 우리와 같은 방향을 봐 달라고.
김형철(이하 가명·28)씨는 지난해 퇴사했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경험한 대기업은 속된 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밤 11시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무자비한 야근과 상사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당했다. 잡다한 업무 역시 모두 막내 몫이었다. 소모품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사표를 쓰고 다시 직업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폴리텍대학에 입학했다. 김씨는 “20대에 필요한 것은 돈보다 내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단지 중소기업에 취업하면 돈을 더 주겠다는 논리로는 절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허태호(25)씨는 고교 졸업 후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생계가 급했다. 그러나 회사는 어렵다는 이유로 월급을 체불하는 일이 잦았다. 월급이 안 나오는 달에는 여기저기서 돈을 꿨다가 몇 달 후 갚는 일이 반복됐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바랐는데 그게 안 됐다. 허씨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기만 해도 좋은 일자리”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한국폴리텍대학 재학생 150명을 대상으로 지난 4∼5일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일 이들의 대답을 빈도 순으로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복지(47회)였다. 안정(26회), 복리후생(15회) 등 유사한 단어를 포함한 ‘복지 단어군’은 전체 응답의 10.7%를 차지했다.
복지에 이어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임금(43회)이었지만 응답자 대부분은 ‘임금보다 중요한 것은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임금이 다소 적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갈 수 있는 직장(25세 여학생)’ 식의 답이 많았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직장 역시 청년들에게 중요했다. 시간(38회), 삶(34회), 야근(25회), 휴가(14회) 등의 빈도수가 높았다. ‘칼퇴 보장’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 회사’ ‘열정페이를 요구하지 않는 회사’가 좋은 일자리였다. 수평적 구조의 회의 분위기,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회사, 사내정치가 없는 회사 등 직장 분위기도 좋은 일자리 여부를 가리는 주요 잣대였다.
청년들의 이런 인식은 ‘특단의 대책'이라며 지난달 15일 발표된 정부의 청년일자리 대책과는 괴리감이 있다. 정부는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현금 인센티브’로 중소기업 취업을 활성화시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청년들이 바라는 것은 이런 단기적 소득지원 프로그램이 아니다. ‘청년실업 해결을 위해 정부가 가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 중 ‘임금’이라는 단어 비중은 13.1%에 그쳤다. 교육이 17.5%로 더 높았고 (일자리)환경 13.3%, 복지 6.8%, 법(준수) 6.8% 등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나근태(28)씨는 “대학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어른들 말만 믿었다. 어릴 적부터 취업에 대한 공적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답했다. 김춘식(31)씨도 “월 30만원의 청년취업훈련수당으로 교통비와 식비 해결도 어렵다”면서 “훈련수당을 넉넉히 줄 수 없다면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청년들의 외침처럼 현 청년실업난은 정부가 주장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일자리 미스매치가 근본 원인이 아니다. 수십년간 지속된 잘못된 시스템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는 학생시절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일찍 발견하도록 돕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현재도 처음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 분야에 잘못 발을 들였을 때 이를 만회할 만한 새로운 기회도 충분치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한요셉 박사는 “청년 일자리는 단순히 현재 임금과 일대일 교환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로 파악돼야 한다”면서 “정부가 단순히 중장년과 유사하게 임금 위주로만 일자리 질을 판단할 경우 시장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24개 기능대학과 21개 직업전문학교를 통합해 2006년 출범한 국책 특수대학이다. 현재 전국 11개 대학 35개 캠퍼스로 구성돼 있다. 최근 5년간 졸업생 취업률은 80%를 넘는다. 이번 조사에는 4차 산업혁명과 연관성이 높은 교육과정을 지닌 5개 캠퍼스 재학생 150명이 참여했다. 응답자는 타 대학 졸업 후 폴리텍대학에 재입학한 이들로 선별했다.
세종=이성규 신준섭 정현수 기자 zhibago@kmib.co.kr
[청년들이 말한다 좋은 일자리란?] 월급 더 줄테니 중소기업 가라는데… “워라밸은요?”
입력 2018-04-09 05:00 수정 2018-04-09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