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칭, 하면 되죠” 불펜 불꺼주는 ‘깜짝 이도류’ 성업 중

입력 2018-04-09 05:00
미국프로야구(MLB)에서 팀이 크게 뒤진 경기 후반에 야수가 투수의 역할을 대체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불펜 투수의 힘을 아끼기 위한 전략이다. 올 시즌에는 8일(한국시간)까지 총 3명의 야수가 등판해 공을 던졌다. 왼쪽부터 템파베이 레이스의 내야수 다니엘 로버트슨, 밀워키 브루어스의 내야수 에르난 페레즈,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외야수 페드로 플로리몬. AP뉴시스

2014년 이후 매년 20차례 이상 야수가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올 시즌에는 벌써 3명이나 등판
장기 시즌 중 ‘버리는 경기’ 투입, 팬들에 볼거리 된다는 점도 작용

“피칭할 수 있겠어?” “왜 안 되겠습니까.”

미국프로야구(MLB) 템파베이 레이스는 8일(한국시간) 보스턴 레드삭스에 3-10으로 크게 뒤진 상태에서 8회말 수비를 맞았다. 찰리 몬토요 코치가 덕아웃에 앉아 있는 내야수 다니엘 로버트슨에게 다가가 투수로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로버트슨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보스턴의 1, 2, 3번 상위타순이 타석에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그는 “일생 중 한 번 찾아올 기회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 이후 등판 경험이 없던 로버트슨은 그렇게 보스턴 펜웨이파크 마운드에 섰다. 빠른 볼이 시속 70마일 후반대(약 125㎞)에 머물렀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삼자범퇴였다. 단 11구로 브룩 홀트를 2루수 뜬공, 앤드류 베닌덴티를 중견수 직선타, 블레이크 스와이하트를 좌익수 뜬공으로 잡아냈다. 로버트슨은 “재미있었다. 그저 볼넷만 안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MLB에서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일은 2006년 한 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2014년부터는 매년 20차례 이상 마운드에 선 야수를 볼 수 있다. 올 시즌은 개막 뒤 불과 10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로버트슨을 비롯해 3명의 야수가 투구를 기록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에르난 페레즈는 지난 6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0-8로 뒤진 9회초에 등판했다. 밀워키의 마무리 코리 크네이벨이 공을 던진 뒤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마운드로 온 페레즈는 배팅볼 같은 80마일의 볼을 던졌다. 그래도 라 스텔라를 좌익수 직선타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쳤다.

모두 무실점으로 잘 막은 것은 아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외야수 페드로 플로리몬은 지난 2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2-13으로 크게 뒤진 8회말 마운드로 호출됐다. 80마일대의 공으로 2차례 연속 뜬공 아웃 카운트를 잡았다. 하지만 레인 아담스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며 18.00의 평균자책점이 기록됐다.

불펜을 돕는 야수로 활약했던 메이저리거 가운데 한국프로야구(KBO) 리그와 인연이 있는 선수도 있다. 한때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대니 워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유격수였다. 그는 2014년 5월 22일 너클볼을 앞세워 1이닝을 투구했는데, 디트로이트 역사상 83년 만에 1이닝을 투수로 마무리지은 야수가 됐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브래드 아스머스 감독은 “마운드에서 던지는 것은 많은 야수들의 꿈”이라고 했다.

이 같은 경향은 불펜의 과부하를 염려한 고육지책이다. 팀당 162경기를 치르는 장기 시즌중 ‘버리는 경기’에서는 불펜의 힘을 아끼려 야수를 마운드에 올린다는 것이다. MLB에서 불펜이 소화한 이닝은 1976년 전체 이닝 중 27.5%였지만 2016년 36.7%로 치솟았다.

여러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불펜 요원은 점점 희귀해지며, 한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위해 투입되는 구원 투수는 점점 많아지는 실정이다. 불펜 구성에 드는 많은 연봉을 얼마간 줄일 수 있다는 점, 팬들의 볼거리가 된다는 점도 ‘야수 투수’의 요인으로 언급된다. LA 에인절스의 오타니 쇼헤이는 투타를 겸업하지만 지명타자로서 투수 이외의 다른 수비 포지션을 맡진 않는다. KBO에서는 NC 다이노스의 외야수 나성범이 2015년 플레이오프에서 마운드에 선 바 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