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자연(37·사진)씨는 매일 아침 6시면 눈을 뜬다. 11살, 9살인 두 아이를 깨워 밥을 챙기고, 출근준비를 하다보면 눈코 뜰 새 없이 아침시간이 지난다. 곧바로 7시 반이면 보건소로 출근한다. 허씨는 꽤 오랫동안 기간제,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했다. 매년 재계약을 거듭하다 최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지만 이전 경력은 인정받지 못했다. 82년생인 그는 자신을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간호사 버전이라고 자조했다. 그러나 삶은 소설보다 처절한 과정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 간호사였다면=“모든 사회문제가 나한테 있더라고요. 극한육아, 경력단절, 비정규직, 산재피해. 온갖 문제의 표본 같은 느낌이에요. 친구들이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말해요. 내가 김지영이라고….” 지난 2009∼2010년 제주의료원에서는 임신한 간호사 9명이 유산하고 4명이 연달아 선천성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해약품을 보호 장비도 없이 다뤘던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유산한 간호사들은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지만, 장애아를 낳은 간호사 4명은 지금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허씨는 그 때 그 간호사 중 한 명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달 말 기자는 우여곡절 많았던 허씨의 이야기를 듣기위해 바다건너 제주도를 찾았다.
2010년 3월 허씨는 선천성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중태에 빠진 아이는 곧장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큰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날 허씨는 분만한 몸을 추스를 시간도, 정신도 없이 산부인과 병상에 누워 남편의 전화만 기다렸다고 한다. 아이는 생후 1∼3주 사이 두 번에 걸쳐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았다. 진단서에는 청색증, 폐동맥판막폐쇄증, 심방중격결손증으로 기록됐다. 아이는 현재 9살, 초등학교 2학년이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이가 자라는 동안 허씨는 간호사를 포기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7∼8년의 경력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비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문제 있는’ 아이를 반기는 보육시설은 없었고, 간호사 업무강도는 여전히 높았다. 허씨는 “간호사를 포기하는데 큰 결심이 필요했다”고 토로했다.
“출산 후에 복직하고 1년을 버텼어요. 아픈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3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데 맡길 곳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어린이집이 빠르면 아침 7시 반에 문을 여는데 급할 때는 어린이집 문 열 시간을 기다렸다가 맡겼죠. 남편, 어머니, 시어머니, 신랑, 고모까지 온 가족이 아이에 매달렸고요. 이걸 1년 넘게 하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을 그만뒀지만 일은 해야 했다. 그러나 허씨를 받아주는 곳은 시간제나 기간제 일자리뿐이고 그나마도 많지 않았다. 매년 재계약을 위해 면접을 봤다. 한 곳에서 2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하기 때문에 일터에서는 일부러 일주일, 보름씩 근무일을 빼기도 했다. “병원에 남은 동료들은 경력인정 받으면서 잘 다니고 있는데 저는 비정규직이잖아요. 그것도 중간에 2년은 놀았고요. 아이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고, 일이 있어도 처우는 항상 그대로죠. 월급 150만원. 아직도 신입급여를 벗어나질 못하네요.”
◇열심히 일한 죄, 의심하지 않은 죄= 허씨가 임신할 당시 2009년은 병원 업무 강도가 유독 높았다고 한다. 간호사 1명이 100명에 달하는 환자를 담당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항암제 등 유해약품을 장갑, 마스크 등 보호장비도 없이 절구에 빻아 포장하는 일(파우더링)도 했다. 임신한 몸으로 높은 업무강도를 겪어야 했고, 유해물질에도 노출되는 환경이었다. 이와 관련 2012년 서울대산학협력단은 당시 약물 분쇄과정에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임산부에게 태아 기형을 일으키는 것으로 규정한 D, X등급 의약품에 노출됐을 것이라는 역학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허씨는 “처음부터 당연히 해왔던 일이라 (유산, 장애)의 원인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다른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일터가 아닌 ‘내 잘못’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당시 선천성심장질환아를 출산했던 4명 중 또 다른 한 명인 현은순(37)씨는 “열심히 일하는 게 태교인 줄 알았다. 첫 직장생활을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에 간호사 생활은 원래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우더링이 아이에게 위험할 것이라고 의심도 못했다”며 “내가 힘내서 열심히 일하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아이한테도 좋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9년∼2010년 선천성심장질환 아이를 출산한 4명의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9년째 산업재해보상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하고 있다. 2014년 1심 행정법원은 역학조사 결과를 인정해 산재로 판결했으나, 2016년 2심에서는 ‘출생아에게 발생한 문제는 산재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현재 대법원 3심 결과만을 남겨두고 있다.
허씨를 비롯한 간호사들의 법정 소송을 계기로 정부도 뒤늦게 해결에 나섰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10월까지 임신 중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을 검토하고, 산재보험법에 별도 입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은 “법원이 출생아는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상이 어렵다고 봤기 때문에 보상을 위해서는 별도 입법이 필요하다. 모성보호와 별개로 태아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고, 출생 후 별도의 급여청구권을 주는 방향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체없는 모성보호 기본권으로 보장해야=헌법 제32조 4항은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은 ‘안전’이라는 기본권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임신한 근로자의 연간 유산율은 2006년 18.7%(5만809건)에서 2015년 24.5%(7만1104건)로 꾸준히 늘었다. 임신한 노동자 4명 중 1명은 유산을 경험한 셈이다. 그럼에도 최근 5년 동안 임신관련 업무재해신청은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8건뿐이다. 업무상 재해 기준에 대한 성별격차도 높다. 이는 ‘사고’ 중심의 재해인정 시스템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에 영향을 주는 산업재해 요인은 실태조사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사업장의 생식독성물질 등 유해인자 노출과 위험성이 체계적으로 조사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미국 애틀란타 등은 한 도시의 전체 출생아를 모니터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역학조사를 진행한다. 우리도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 교수도 “임신노동자의 모성보호를 위한 직장 내 안전 및 보건정책이 없다. 임신 유해환경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여성노동자들은 결혼과 임신을 기피하고 안전한 직장으로 전직하거나 퇴직하고 있다.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의료원 산재피해 간호사들을 도운 강영애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제주의료원분회장은 “현행 헌법에도 모성보호나 여성노동에 대한 조항이 있지만, 실제 삶에 적용이 안 되고 적용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지난 9년간 절실히 느꼈다. 또 다시 유명무실한 헌법으로 남지 않으려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허씨는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살아갈 다음 세대에는 약자들이 희생되지 않고 보호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전미옥 쿠키뉴스 기자 romeok@kukinews.com
제주의료원 간호사들 장애아 출산… 그후 허자연씨
입력 2018-04-08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