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 이대론 안된다] 정부·지자체 무관심 속 최장 23년 ‘방치’

입력 2018-04-03 05:00

모두 지적 장애 의심되거나 장애등급 판정 받은 사람들 오랫동안 노동력 착취 등
심각한 인권 유린 당하고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해 결국 주민들 제보로 구출

현대판 노예 피해자 사건은 지적 수준이 낮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심각한 인권 범죄다.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이 보도된 지 4년이 지났지만 근절되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발굴·구조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했고 사건이 불거진 뒤에는 임금체불 사건 정도로 대응하는 데 그쳤다. 국민일보는 올 초 확인한 5건의 피해 사건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 봤다.

최근 잇달아 구조된 ‘현대판 노예’ 사건 피해자들은 심각한 인권 유린을 당하고도 이를 인지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속박 당한 상태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지적장애를 앓고 있거나 심각한 의심 증상이 나타났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만한 능력조차 없는 사회적 약자였다. 모두 최소 10년 넘게 노예 생활에 방치돼 왔다.

그러나 이를 적극 보호할 책무가 있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적장애인에 대한 지역사회의 낮은 인권 감수성도 이를 거들었다.

국민일보가 올 1분기 확인한 현대판 노예 피해자는 모두 5명(국민일보 2월 5일자, 3월 12일자, 4월 2일자 1면 참조)이다. 이들은 서울, 경북, 충남 3곳 등 모두 다른 지역에서 구조됐다. 현대판 노예 피해자가 ‘염전 노예’ 사건이 발생한 전남 신안군 등 도서 벽지나 오지에 국한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뜻이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피해자는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 한복판에서 발견됐다. 현대판 노예 사건이 전국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모두 장기간에 걸쳐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3년이나 됐다. 근무 환경도 열악했다. 경북에서 발견된 60대 남성은 축사 관리를 하며 농장주 축사에서 염소를 먹이고 소똥을 치우는 일을 했다. 충남 A군에서 발견된 피해자는 벼농사 등 농작물 재배, 박스 포장, 납품까지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했다. 이들은 농장, 분리수거장, 축사 등에서 하루 평균 12시간에서 18시간 정도를 일했다. 쉬는 날도 별로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다. 경북 농가에서 구출된 피해자는 2013년에 통장이 개설됐지만 그가 사용한 흔적을 찾기 어려웠고 잔액도 없었다. 충남 B시에서 구조된 남성은 임금 자체를 받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충남 A군 피해자는 10년 이상 일했지만 받은 임금이 80여만원에 불과했다.

주거환경 역시 온전치 못했다. 피해자들은 간이컨테이너와 창고, 쓰레기 적환장 내부 컨테이너박스, 축사 옆 작은 집 등에서 지냈다. 더러 냉난방이 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구조 기관 관계자들은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비위생적인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잠실운동장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집 내부는 고물이 가득했고 쓰레기 냄새가 심하게 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장기간 착취당해 왔지만 도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5건 전부가 지적장애가 의심되거나 장애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고 스스로 인권 침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부는 기관에서 구조하려 했지만 ‘일을 해야 한다’며 장시간 거절하기도 했다.

장애단체 관계자는 “장기간 그곳에 있다 보면 오히려 외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면서 “사장에게 오랜 기간 지시를 받으며 그곳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구조 당시 피해자들의 초췌한 옷차림과 건강상태, 질 낮은 주거환경 등은 외관상으로도 손쉽게 위급한 상태임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역사회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충분히 인권 침해를 인지하고 구조가 가능했던 셈이다. 그러나 대다수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존재를 인지했으면서도 인권 침해 여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경찰과 구조기관 등이 접근하면 “피해자들의 존재를 알지만 임금을 제대로 받는지 등 구체적 상황을 몰랐다”고 답하기 일쑤였다. 일부는 “불쌍해서 데려다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구조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두 인권 침해에 관심을 갖게 된 일부 주민의 제보로 발굴됐다. 지난달 21일 충남 B시에서 10년이 넘게 농가에서 일하다 구조된 박태진(가명·57)씨는 ‘농가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죽어라 일하는 남성이 있다’는 한 주민의 제보로 구조됐다. 제보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언론 보도들을 보면서 그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들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린 것도 일부 마을 주민이었다. ‘아픈데도 쉬지 못하고 일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인권유린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등 각자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이웃의 삶과 인권에 관심을 가진 주민의 제보들이 5명을 구한 셈이다.

허경구 김지애 기자 nine@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