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신뢰를 잃을까 조심하라

입력 2018-04-03 05:00

공권력이 힘을 자랑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공권력의 폭압은 집권 정치세력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성숙해진 지금, 정치권력과 유착된 물리적인 권력 남용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기관들의 충성심 경쟁은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무분별하고 무조건적인 충성을 권력 상층부에 진상하는 대가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유혹의 길로 줄달음치는 기관들의 행태가 정권교체기마다 나타났기 때문이다.

최근 울산과 창원에서는 두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경찰 지휘부와 야당 간의 대결이 격화되고 있다. 이미 여러 언론에 보도된 대로 야당의 유력 입후보자들에 대한 비리 수사가 발단이 된 것이다. 경찰은 지난해 11월에 이미 고발이 들어온 사건이라 통례에 따라 강제수사가 이루어지게 됐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야당 후보자의 출정식 날 수사를 개시하여 남의 큰 잔치에 재를 뿌리는 꼴이 된 데는 틀림없이 정치적인 복선이 깔려 있다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항의 방문에 이어 비속어까지 동원하여 격렬한 공격을 퍼붓던 야당은 드디어 검찰에 해당 지역기관장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데는 현재 진행 중인 검·경 수사권 조정을 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부 기관 나름의 과잉충성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시빗거리가 매번 반복되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사는 결코 현미경만으로 병인을 밝혀내는 수작업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멀리 있는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때로는 망원경과 같은 시각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온갖 권력 남용과 인권 탄압은 바로 권력기관들이 근시안적으로 권력의 충견을 자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권력기관의 탈정치화, 정치적 중립화,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 등을 요구해 왔다. 또한 사법적 정의는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이르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는 점도 누누이 강조해 왔던 것이다.

특히 공직선거를 앞두고는 공권력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만한 권력행사를 삼가는 것이 옳다. 수사는 시각을 이미 발생한 미시적 범죄사실이라는 과거로 지향하는 작용인 반면, 선거는 다가올 권력을 새로 세우기 위해 미래로 전 국민의 거시적 시각을 모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공직선거 기간에는 선거법 위반 사건이 아닌 일반 사건에 대해선 수사 권력이 특정 후보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사를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다. 과거 범죄 사실은 선거 축제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지난 15대 대통령선거 기간 중 이른바 DJ비자금 사건이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수사권 발동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당시 수사기관은 민의의 흐름을 왜곡시킬 위험이 크다는 점을 심사숙고한 나머지 수사권 발동을 자제했고, 선거는 무리 없이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발된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사권 행사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사권 행사에도 한계와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다. 때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과도한 권력 작용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면, 그런 오해들은 정의를 추구하는 권력기관에 생명과도 같은 신뢰를 실추시키기 쉽다. 유죄 확정까지는 선거기간을 지나 더 많은 시일을 요하기 때문에 무죄가 추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단 수사권을 발동한다면 선거에 나타날 민의를 왜곡시킬 수 있고, 또 후보자들 간 공정한 게임을 방해할 염려도 생긴다. 그러므로 수사 자체가 역으로 선거의 공정성을 해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우리 헌법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이념은 최소한의 권력 작용으로써 국민의 최대한의 자유와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신권위주의의 등장을 경계·방어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헌을 논하는 지금 국가권력 작용의 절대 권력화를 막는 제도적 장치도 중요하지만, 더욱 긴요한 것은 권력기관 종사자들이 현명한 국민의 눈앞에서 절제의 미덕과 자기 분수를 지키는 일이다.

마침 우리는 부활 절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 바울은 항시 “쓰임 받은 다음에 버려질까” 조심하면서 치열한 복음전도사역의 길을 걸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게 마련이듯 권력의 속성도 그런 것이다. 거기에 취하지 않고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똑바로 걸어가려면 늘 겸손과 사랑이 담긴 정의감을 가슴에 채워두어야 한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