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한국교회, 주인의 길을 되찾자

입력 2018-04-03 00:01

교회사학자 박명수 교수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민족에게 서양문명을 전달하는 통로였다고 한다. 한국사를 볼 때 유교와 불교는 한반도에 중화문명과 인도문명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륙문명은 19세기 이후 커다란 장벽에 부딪혔고 우리 민족의 운명 역시 한계점에 다다랐다. 이럴 때 등장한 것이 기독교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특별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민족은 소련, 중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고 일본과는 더 혐오적인 관계가 설정된 반면, 유일하게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한·미 관계의 중심에 선교사와 기독교가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한국인이 미국으로 가는 통로였고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며 지원하는 근원으로 작용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공립학교 교육은 오직 일왕의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데 목적을 두었지만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미션스쿨은 성경에서 교훈한 자유와 인권, 평등과 박애 사상을 가르치며 서구 민주주의 문화를 가르쳤다. 그러자 초대 기독교인들은 애국애민의 사람들이 되어 3·1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에도 한국교회는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연약한 정부 시절 교회는 문화 체육 교육 등을 맡으며 유사정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기독교가 손님이 아닌 명실상부한 주인 종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물량화, 세속화 길을 가면서 점차 현대인에게 괴리감을 주는 종교가 돼 가기 시작했다.

또 어느 때부터인가 전통문화와 민족문화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기독교의 역할과 공헌이 불식되고 오히려 외래 종교의 이미지로 비춰지게 됐다. 특히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소설에서는 기독교가 ‘마마와 같은 손님’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소설에서는 원래 주인은 무속종교였는데 손님인 기독교가 들어와 주인을 내쫓아버렸다고 표현한다. 물론 소설은 허구이며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꼭 이런 내용을 써야 했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 땅에 반미 감정이 격화되고 있는 반면에 중국의 사회주의 흐름과 중화문명이 조금씩 밀려오는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친중·친미 간 싸움이 계속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특히 오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면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에 어떤 변수를 줄 것인가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이럴 때 한국교회는 절대로 친중, 친미 싸움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또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것도 금물이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와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중국교회와도 적극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 중국을 선교 대상으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교회와 깊은 교류를 함으로써 중국에 민주화와 선진화의 바람이 불어가도록 해야 한다. 자칫하면 대한민국이 사회주의나 중화주의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역시 서로 부정적인 대립관계로 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미국과 중국이 선의의 경쟁 관계가 되도록 작은 중보의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이 시대 한국교회의 창조적 퓨처마킹(Future Marking)이요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주인의 종교로 인정받는 첩경이 될 것이다.

“도대체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인은 1%도 안 됐다. 그런데도 주인 종교의 역할을 톡톡히 하지 않았는가. 또 이 모든 일을 4월에 다하자는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전략적으로 모든 교회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 질서를 세워가는 단계적 퓨처마킹을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손님이 아닌 주인의 길을 되찾자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연합이요, 퓨처마킹의 동력이다.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