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지만 가장 위험한 증거 ‘자백의 역설’

입력 2018-04-02 05:02

누명 쓴 당시 16세 소년 강압수사 못견뎌 허위자백
사망사건 증거 확보 어려워 수사기관 자백 획득에 집중
허위자백 유발 위험성 커 자포자기로 거짓 발언도
수원 카페 살인 자백 불인정… 징역 15년이 항소심서 무죄


“다시 말할 거예요. 어제 자백은 바보짓이었던 것 같아요.”

2007년 경기도 수원 노숙소녀 상해치사 사건 피의자 A군은 두 번째 검찰 조사 초반에 혐의를 부인한다. 그러나 수사관의 추궁이 반복되자 50분 만에 “저희가 그런 것 같아요”라며 말을 바꾼다. 검찰은 A군을 비롯한 가출청소년 5명의 자백 등을 근거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1심에서는 실형이 선고됐지만 2심과 대법원은 “검찰이 선처를 내세워 회유해 자백을 받아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0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누명을 쓴 최모(당시 16세)씨도 경찰의 강압수사로 한 거짓 자백이 발목을 잡았다. 사건 발생 18년 만인 지난 27일 대법원은 진범 김모(37)씨에게 징역 15년을 확정했다.

자백은 아주 강력한 유죄 증거가 되지만 허위자백일 경우 오판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실제로 살인 등 생명침해 범죄에선 허위자백률이 높게 나타난다. 김상준 변호사가 법관 시절 쓴 논문 ‘무죄 판결과 사실 인정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심에서 판단이 뒤집혀 무죄가 선고된 강력사건 540건 중 114건(21.1%)이 살인 관련 범죄였다. 이 중 44건(38.5%)이 허위자백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생명침해 범죄에서 허위자백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범인 검거에 대한 수사기관의 압박 때문이다. 살인사건은 피해자가 사망해 피해자로부터 증거를 확보할 수 없다. 수사기관은 자백을 받아내는 데 집중하게 되고 고강도 수사는 허위자백을 유도할 위험성을 높인다.

허위자백의 원인은 다양하다. 폭행 등 물리력 행사 없이도 허위자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기수 경찰대 교수가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 사이 발생한 허위자백 사건 46건을 조사한 결과 폭행(16%), 장시간 조사(10.6%), 협박(4.7%), 회유(7.4%) 등이 원인으로 분석됐다.

김 변호사는 불이익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허위자백하는 피의자의 심리를 7가지로 분류했다. 일상에서 완전히 단절된 채 고립된 공간에서 조사받게 되면 순응도가 높아진다. 수사관이 “거짓말하지 마라”며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커진다. 언제 이 수사가 끝날지 예상할 수 없어 막막하다. 수사관은 절대 자신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는 회의감에도 사로잡힌다. 일단 자백해 이 상황에서 벗어난 뒤 재판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 될 것 같다는 착각에도 빠진다. 김 변호사는 “허위자백이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시되면 무고한 사람도 좀처럼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유죄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는 장기미제 사건인 2007년 수원역 카페 여주인 살인사건의 최근 판결에서도 드러난다. 서울고법 형사9부는 지난 1월 25일 범인으로 지목된 박모(37)씨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박씨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이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거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상태에서 자백을 받아냈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여러 정황에 비춰 “자포자기 심정으로 허위자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을 이끈 박준영 변호사는 1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위험한 증거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논문에서 “자백이라는 직접 증거로 유죄 인정을 하려면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