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생태적 회심

입력 2018-03-30 05:05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미세먼지는 숨 막히고, 무엇보다 이 봄이 어느 순간 폭염으로 돌변할지 두렵기까지 하다. 1960년에 과학자 레이첼 카슨이 예견한 ‘침묵의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직은 새들이 지저귀고 꽃도 핀다. 이미 환경재앙의 시대이지만 우리는 더욱 섬세하게 환경에 눈떠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맨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에는 무려 7번이나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보시기에 좋았다”이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세상을 짓고 “좋았다”고 하신다. 이 “좋았다”를 여섯 번이나 반복한 후에 마지막으로 “참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좋다’는 ‘아름답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연이어 자신이 지은 것을 보고 “좋다!” 혹은 “아름답다!”고 감탄사를 연발한 것이다. 감동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주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 보통 자연이라 불리는 이 세계가 결코 악하고 추한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지으시고 경탄하신,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성서는 창조세계에 대한 ‘대(大)긍정’을 말하는 것일까?

영지주의(靈智主義)를 신봉하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주후 1∼4세기 지중해 일대에 왕성히 번창했던, 기독교 최초의 이단이다. 플라톤 사상에 심취한 이들은 ‘영은 선이고 육은 악’이라는 극단적 영육이원론에 빠졌다. 때문에 그들은 성육신(成肉身), 즉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은 영이고 영은 선이다. 하지만 육은 물질이고 악이다. 따라서 선인 신이 결코 물질이고 악인 육체를 입고 올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는 바로 이 이단사상과의 오랜 싸움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결과가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물질)와 ‘정신’(영혼)을 합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통 기독교의 구원은 전인구원이다. 전체구원이다. 구령(救靈), 즉 영혼만 구한다는 말은 영지주의 교설에 가깝다.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성경 구절의 하나인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세상’은 원어로 ‘코스모스’(cosmos)이다. 우주만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깊이 사랑하신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영혼만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인 것이다. 성서는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로티누스는, “참된 철학자는 몸이 아니라 오직 영혼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원론적 철학이 지배하던 세계 속에서 기독교 최고의 전도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차이는 명확하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몸(물질, 자연)으로부터 도망치는 구원’을 가르쳤지만, 기독교는 ‘몸(물질, 자연)과 함께 받는 구원’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언 땅을 뚫고 새 생명이 피어난다. ‘침묵의 봄’이 오기 전에 눈을 떠야 한다. 환경을 향한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환경에 눈 뜬다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을 위한 무대장치나 자원 정도로 여겨왔던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피카소의 작품보다 더 위대한 신의 작품으로 새롭게 보아야 한다. 그런 ‘생태적 회심’이 초미세먼지로 숨도 쉬기 어려운 이 비극적인 봄에,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