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그린 태극기 들고 독립만세!

입력 2018-03-29 05:00
경기도 용인 머내마을 주민들이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만세 운동을 재현하기 위해 지난 24일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수지구 동천동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머내만세운동준비모임 제공

토요일이던 지난 24일 경기도 용인 고기초등학교 운동장. 흰 상의를 입은 주민들이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아침 일찍 들뜬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곧 태극기 물결이 운동장을 뒤덮었지만 흔히 보던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와는 달랐다. 주민들이 직접 색연필이나 물감으로 칠해 만든 태극기 중에는 촛불이나 세월호 리본을 그려 넣은 것도 있었다.

“우리민족 한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걷는 이들은 수지구 머내마을(고기동·동천동의 옛 이름) 주민 350여명(주최 측 추산)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29일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재현하기 위해 모였다. 지역 역사 공부 모임 ‘머내여지도’가 지난해 원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하다가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게 발단이 됐다.

김경애(48)씨는 “99년 전 이곳은 산골이었을텐데 여기서도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더라”며 “판결문과 고지도를 보면서 고기초등학교에서 주막거리까지 5㎞의 행진 경로를 찾아냈다”고 했다. 지난 1월에는 3·1운동 99주년에 맞춰 머내만세운동 준비모임이 결성됐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정승민(41)씨는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악화됐다”며 “혹시 안 좋은 시선이 있을까봐 걱정이 컸다”고 했다. 준비모임에 참여한 주민들은 이번 기회를 오히려 태극기의 의미를 되찾는 계기로 삼자고 뜻을 모았다.

사랑방 이불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운동에 나섰다던 이곳 안종각 독립운동가의 일화가 큰 자극이 됐다. 미술팀은 99년 전의 독립운동가들처럼 주민들과 함께 며칠 밤을 새우며 수백개의 태극기를 손수 만들었다.

태극기에 촛불과 세월호 리본을 그려 넣자는 아이디어도 여기서 나왔다. “태극기는 누구의 것도 아니잖아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태극기의 본질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걷기대회는 대형 태극기를 함께 든 주민들이 동천동 옛 주막거리 자리에서 “만세”를 외치며 마무리됐다. 채수진(18) 소명중고등학교 학생은 “광화문 촛불집회에 갔을 때 태극기를 든 할머니가 저희에게 ‘너희들 진짜 못된 짓 하는 것’이라며 욕설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 후로 태극기만 보면 거부감이 들고 싫었다”며 “함께 만세를 외치면서 국기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용인=이재연 기자 jay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