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방식을 언급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일괄 타결을 원하는 한국이나 곧바로 비핵화 논의에 들어가려는 미국과는 입장 차이가 난다. 북·중 정상회담으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을 출발점으로 해서 북·미 간 담판으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쐐기를 박으려 했던 한·미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중국까지 새로운 대화 축으로 등장함으로써 치열한 수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단계적 조치는 한마디로 행동 대 행동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방식이다. 비핵화 조치와 체제안전 보장 조치를 상호 조율된 단계를 거치며 풀어가자는 취지다. 매 단계마다 대북 제재 완화 등 보상을 요구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북한의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주장대로 과거 수차례 실패해 온 북핵 해법이기도 하다. “북한은 시간을 벌려고 협상을 최대한 천천히 굴려가려고 할 것”이라는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의 예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한과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의 단계적 조치 카드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과거 북한은 불가역적 단계에 진입하면 보상만 챙긴 뒤 협상 파기를 선언하곤 했다. 그러기에 단계적 조치를 언급한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에 의구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조력자로 확보해 몸값을 키워보려는 속내가 엿보인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중국을 움직여 대북 제재 전선에 균열을 내보려는 측면도 없지 않다. 한·미 양국은 김 위원장의 일방적 페이스에 휘둘려선 안 된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로드맵을 먼저 공개해야 국제사회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이를 통해 비핵화 의지를 되돌릴 수 없는 약속으로 만들어야만 체제 안전이 보장됨을 명심하길 바란다.
정부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치밀한 정세 분석을 통해 정교하게 대북 정책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29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리는 남북 고위급 회담에선 북한에 단계적 조치의 로드맵과 의미를 밝힐 것을 요구해야 한다. 같은 날 방한하는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과의 만남은 중국의 입장과 김 위원장의 의중을 파악하는 계기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한편으로 일방적인 대북 제재 완화가 있어선 안 된다는 뜻을 중국에 확실히 전달해야 한다.
[사설] 김정은의 일방적 페이스에 말려선 안 된다
입력 2018-03-29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