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동 칼럼] 사교육의 역습

입력 2018-03-28 05:05

학생 수 매년 줄어드는데 사교육비는 사상 최고 행진… 소득별 양극화도 극심해져
학원 공화국에서 벗어나고 교육 사다리 복원하는 길은 교실 현장 혁명 통해 공교육 경쟁 강화하는 것뿐


“조선의 양반이나 잘사는 사람들은 자식들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며 어릴 때부터 선생을 두어 글공부를 시키는데 이것은 이 민족이 매우 중시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읽습니다. 현인들의 저서를 읽고 이를 이해하며 설명하는 것을 보면 정말 놀랄 만합니다.” 1653년 제주도 해안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고국으로 돌아가 기록한 ‘조선왕국기’에 적힌 글이다. 조선의 교육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부모들의 극성스러운 교육열에는 다 내력이 있는 듯하다. 360여년 전에도 지금 못지않으니 말이다.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 받고 성공한다는 인식에 우리네 부모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자녀들을 대학에 입학시키려 했다. 대학 합격자 기준으로 1990년 33.2%에 불과했던 대학 진학률은 95년 51.4%, 2000년 68%, 2005년 82.1%에 이어 2008년 83.8%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추세적으로 하락해 지난해 68.95%까지 떨어졌지만 여전히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나친 교육열은 급기야 외국인들이 갸우뚱할 법까지 만들어졌다. ‘공교육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 그것이다. 정확히 4년 전인 2014년 3월에 제정된 이 법은 일명 ‘선행학습금지법’으로 불린다. 초·중·고교 및 대학의 정규 교육 과정과 방과 후 학교 과정에서 선행 교육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선행 학습을 유발하는 평가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학원·교습소 등 사교육 기관은 선행 교육을 광고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도 담았다. 비정상적으로 사교육이 횡행함에 따라 공교육이 무너지고 서민·중산층의 가계 경제가 악화하는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행 4년이 흐른 지금 이 법은 교육 현장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아니올시다’다. ‘법 무력화’가 더 맞을 듯하다. 학교에만 적용되고 정작 학원은 광고만 금지할 뿐 무풍지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선행학습 시기는 더 빨라졌고 그 범위는 더 넓어지고 있다. ‘초등 때 중등 완성, 중등 때 고등 완성’은 더 이상 교육열이 높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얘기가 돼 버렸을 정도다. 수능과 고교 입학제도 개편, 자유학기제 확대(자유학년제), 고교 학점제와 개정 교육과정 도입 등 교육 체계의 대변화가 이루어지거나 예고되면서 선행학습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남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선행 심리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자유학년제를 두고 엄마들 사이에선 “진짜 자유를 즐기다간 우리 애만 바보 된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자유학년 기간이 선행 학습하기 딱 좋을 때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학원으로 대변되는 사교육으로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최고 수혜자가 교육 수요자가 아닌 학원이 될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는 통계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교육부와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7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생 1명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7만1000원으로 전년보다 5.9% 증가했다.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전년보다 2.7% 줄었는데도 사교육비 총액(18조6000억원)은 전년보다 5000억원이나 늘었다. 2013년부터 5년 연속 사상 최고 행진이다. 소득별 양극화도 극심하다. 월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의 사교육비(45만5000원)는 200만원 미만(9만3000원)의 4.9배에 이르렀다. 수저 계급론이 고착화하는 양상이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처럼 교육은 한때 서민의 계층 이동 사다리였다. 하지만 사교육 수요가 폭발하면서 교육은 되레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빼앗고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전락하고 있다. 4년 전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사교육비 지출이 가장 높은 국가가 한국”이라며 “교육이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지금은 사교육비가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공공 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를 제안했다. 적확한 진단이다. 학교 경쟁력 강화가 사교육과 선행 학습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얘기다. 애꿎은 입시제도 등을 바꾸려하기 전에 공교육 붕괴부터 막는 것이 우선이다. 교실 혁명을 통한 공교육 살리기는 시대적 과제다. 학교에선 잠이나 자다 학원으로 달려가는 ‘학원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교육 사다리가 끊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텐가.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