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7일, 그날은 정말 운이 좋았다. 마포구 사회복지인들과 워크숍을 마치고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경기장을 찾으니 그 유명한 대한민국-이탈리아 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초 우리가 구입한 티켓은 3, 4위 결정전이었고, 누가 경기의 당사자가 될 줄 몰랐는데, 마침 한국 팀을 맞게 된 것이다. 경기장은 동메달을 향한 함성으로 가득했고, 대통령 내외의 얼굴이 전광판에 잡히기도 했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장애인 경기여서 아이스하키가 스케이트가 아닌 썰매를 타고 진행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알았다. 양손에 잡은 스틱이 썰매를 추진하는 스파이크로 쓰다가 순식간에 퍽을 모는 블레이드로 바뀌었다. 이렇듯 게임과 룰에 문외한이면서도 금방 경기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스피드와 힘이 버무려진 특유의 박진감 때문이었다.
선수들의 몸은 일정하지 않았다. 썰매 위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선수, 다리 하나만 뻗은 선수, 다리가 무릎 부분에서 멈춘 선수가 섞여 있었다. 두 다리 선수는 묵직한 몸으로 과감한 보디 체크를 했고, 무릎 다리 선수는 날쌘돌이처럼 빠른 기동력을 자랑했다. 선수들은 급회전을 하다가 바람개비처럼 나뒹굴었고, 그때마다 주인 잃은 스틱이 빙판 위에 굴러다녔다.
경기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선수들 동작 하나하나에 투혼이 담겨 있었고, 3피리어드가 끝날 때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우리 팀이 1대 0 극적인 승리를 거두자 뜨거운 눈물이 얼음판을 적셨다. 승부를 넘어 그들이 달려온 생애에 경의를 바쳤다. 열흘이 지난 지금도 장면 장면이 선연하니 평창이 내게 준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아이스하키처럼 주목을 받지 못했어도 또 하나 뜻 깊은 무대가 있었으니 13일 열린 장애인 패션쇼였다.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대한민국의 밤’ 행사에서 건국대 이상은 명예교수는 장애인용 한복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두루마기를 편하게 입도록 뒤는 짧고 앞부분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옛사람들이 말 탈 때 입던 구의(?衣)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저고리 끝동에 점자를 새겨 넣었고, 옷고름 모양의 단추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복지에는 이런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이에 비해 공공의 인식은 여전히 지체돼 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각 공공기관 건물 벽면에 붙인 플래카드를 보자. ‘2018년 2월, 당신은 누구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평창 동계올림픽 2.9∼2.25, 평창 동계패럴림픽 3.9∼3.18’이라고 적었다. 패럴림픽이 3월에 열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적어놓고도 ‘당신이 머물 곳은 2월’로 특정했다. 패럴림픽을 올림픽의 부속물 정도로 여긴 탓이다.
우리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잊고 말 것인가. 그러면 잠시 반짝했던 장애인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숨죽이며 살 것이다. 일본을 여행하는 상품에는 다다미방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고,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논의에 장애인을 참여시키지 않고, ‘무릎 호소’ 6개월이 지났는데도 특수학교가 민원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보노라면 패럴림픽을 치르고도 의식의 진전이 없는 것 같다. 전 세계 인구의 15%는 어느 정도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그중 90%가 후천성 장애인인데도 그저 남의 일, 남의 불행으로 여긴다.
“모든 탄생에는 삶의 권리가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도 부천에서 고아들을 많이 거둔 펄 벅의 말이다. 장애인은 홀로 빛나고 스스로 우뚝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차별과 배제의 장벽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평창이 자랑스럽다면 그들을 대하는 마음도 자랑스럽게 바뀌어야 한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 (인덕대 교수)
[청사초롱-손수호] 우리는 또 그들을 잊을 것인가
입력 2018-03-28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