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불멸의 투수 최동원(롯데 자이언츠)과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간 최후의 맞대결을 그린 영화 ‘퍼펙트 게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최동원과 선동열이 처음 대결한 경기에서 롯데가 패하자 부산 홈관중이 해태 차량에 불을 지른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열린 정부 대책회의에서도 관중 난동이 화제가 됐다. 한 남자가 브리핑을 한다. “지난번 맞대결이 이 정도입니다. 이번에도 (이 둘을) 다시 한번 붙이는 겁니다. 이 경기를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감정으로 증폭시키고 표가 쪼개지는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는 겁니다.” 고위 인사가 거든다. “프로야구 이거 각하가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럼 각하를 위해서 한번 제대로 써먹어야지. 당장 판 짜!”
물론 이는 허구다. 하지만 198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 프로야구가 국민을 하나로 묶기보다 분열의 기제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광주의 피를 묻히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장려했다. 국내 최고 인기스포츠 프로야구는 정권의 적극적 지원에 의해 성공을 거둔 수혜주였다.
이처럼 권력의 도구로서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오명까지 쓴 프로야구는 21세기 들어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관중 폭력, 음주 추태 등 한때 야구계에 드리워졌던 짙은 그늘은 많이 걷혔다. 그늘이 사라진 공간에 흥과 멋, 열정이라는 양지가 들어앉았다. 취객과 중년남성이 자리 잡았던 관중석은 여성과 가족 단위 팬이 대체했다. 올해 900만 가까운 관중을 예상하는 프로야구는 명실상부한 국민스포츠로 발돋움했다. 갈등의 장에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 프로야구를 보고 있노라면 한 단계 더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바로 국민통합의 장이다.
온라인 댓글란이 황폐화한 것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요즘 보면 거의 내전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미투’ 운동에다 1년여 사이 보수정권 대통령 2명이 모두 구속되는 적폐청산 여파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글을 읽다 보면 나와 다른 성(性), 세대, 이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혐오발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갈등 해소를 위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지난 24일 올 시즌 프로야구 개막 경기가 열린 전국 5개 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중석에서 남녀, 노소가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춤추는 신명나는 광경이 전파를 탔다. 어찌 보면 정치권이나 사회지도자들도 손대지 못한 사회갈등을 풀 실마리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장에서는 미투 운동으로 남녀가 얼굴 붉힐 일이 없다. 정치색에 대한 차이로 아버지와 아들이 언성을 높이는 장면도 볼 수 없다. 팀에 대한 애정과 목청껏 외치는 응원 속에서 갈등이 수그러드는 공간이다. 근로시간 단축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시대에 매일 오후(월요일 제외)에 열리는 프로야구는 공동체 문화와 소통의 무대로 제격이다. 즐거움 속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싹틀 가능성은 높다. 팬들이 상대팀 팬과의 교류에 나서거나 직장 임직원들이 함께 와서 응원하면 국민통합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프로야구는 스토리와 감동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매력이 있다. 프로야구 개막에 맞춰 25일 밤 TV에서 방영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을 봤다. 패전처리 투수가 선발 1승을 따내기 위한 악전고투를 다룬 것으로 감사용은 1등이 되지 못한 대다수 보통시민의 꿈과 희망을 대변한다. 감사용처럼 팀 내 스타들 틈바구니에 끼어 1승, 1안타를 위해 땀 흘리는 많은 선수의 열정이 주는 울림에 국민들은 감동하고 호응한다. 여기에 남녀, 좌우, 세대의 인식차가 있을 수가 없다.
개그맨 정준하는 한 야구 서적에 추천사로 ‘야구는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무한도전의 기록’이라고 썼다. 올해 프로야구가 사회에 만연된 갈등과 반목을 없애고 진정한 ‘우리’를 드러내는 무한도전의 여정을 만들길 팬으로서 기원해 본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
[돋을새김-고세욱] 白球야, 갈등 안고 날아가자
입력 2018-03-27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