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환제, 영국 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외면 왜?

입력 2018-03-26 05:01

부분 아닌 전체 위해 활동 자유위임원칙과 충돌 정치적 악용 소지 등 우려
베네수엘라 등 10여國 불과 영국도 요건 까다롭게 규정
발안제는 여러 국가서 시행… 한국, 법률안에만 적용 방침


대통령 개헌안에 포함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가 일부 헌법상 원리와 충돌하고, 정치적 악용 우려가 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거의 도입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청와대가 지난 22일 공개한 대통령 개헌안 45조 2항에는 국민이 현직 국회의원을 소환해 투표를 통해 파면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 규정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주요 선진국에서 외면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행한 ‘헌법개정 시 국민소환제 도입의 쟁점’ 보고서에 따르면 국회의원을 유권자 발의·투표로 소환 가능한 국가는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나이지리아 등 10여국이다. 이 중 선진국은 영국이 거의 유일하다.

영국의 국민소환법은 2009년 하원의원들이 의원수당을 남용한 ‘지출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의원윤리를 강화하려는 취지에서 2015년 도입됐다. 다만 영국의 국민소환법은 하원의원이 형사문제로 기소돼 형이 확정된 경우, 의원윤리위원회에서 정직을 당한 경우 등 소환 사유를 엄격하고 상세하게 규정한다. 실제로 영국에서 소환당한 하원의원은 없다.

보고서는 국민소환제가 도입될 경우 국회의원이 전체 국가이익을 위해 활동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인 ‘헌법상 자유위임원칙’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자유위임원칙은 국회의원이 국가이익을 위해 내린 결정은 국민의 뜻에 반해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만약 국민소환제가 도입돼 국민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한 국회의원을 언제든지 끌어내릴 수 있다면, 자유위임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 이외에도 ‘신임투표의 남용’ ‘헌법상 무죄추정원칙과의 충돌’ 문제 등도 보고서는 거론했다.

국민소환제 개헌안이 통과되더라도, 관련법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입법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스스로를 옥죄는 엄격한 국민소환제도를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정족수 등 세부적인 소환 요건을 까다롭게 정할 것으로 보인다”며 “전국구 단위에서 뽑힌 비례대표 의원은 누가 어떻게 소환할 것인지도 논란거리”라고 지적했다.

국민소환제가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관은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상대 당 유력 정치인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국회의원 개개인의 소신은 사라지고 입법 활동이 지역주민들의 요구에만 초점을 맞추는 인기영합주의로 흐를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국민소환제와 함께 도입되는 국민발안제의 경우 스위스 핀란드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도입·시행 중이다. 스위스는 헌법개정안에 한해 10만명 이상의 국민이 함께 발의할 수 있다. 1891년 스위스에 국민발안제도가 도입된 이래 총 209건이 제안됐고 이 중 22건이 최종 채택됐다. 2012년 법률안에 대한 국민발안제가 도입된 핀란드의 경우 6개월간 5만명 이상의 서명을 얻어야 한다. 핀란드에선 이를 통해 2015년 최초로 국민발안 입법이 성공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발안제가 정식 도입되면 헌법안이 아닌 법률안에만 적용될 방침이다. 하승수 헌법자문특위 부위원장은 “특위가 낸 안에선 유권자 40만명 이상이 서명하면 법률안을 발안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일정 기준을 채우게 되면 국회에서 안건으로 다루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