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간 금융사, 진입장벽에 “어휴”… 新남방정책 ‘복병’

입력 2018-03-26 05:01
동남아점포 비중 36%로 증가… 베트남이 48개로 가장 많아
美·日 등 러브콜 이어지자 각국, 자본 요건 강화 문턱 높여
“전산망 깔아라” 무리한 요구… 은행 2곳 인수해야 진출 허용


정부가 ‘신(新)남방정책’을 천명했지만 금융권에선 아직 먼 얘기다. 민간 금융회사의 동남아 진출이 여전히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진입 요건을 강화하는 등 ‘콧대’가 높아졌는가 하면 간혹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기도 한다. 일부 금융권에선 체계적 전략 없는 동남아 진출이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으로 남진 않을지 우려한다.

2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해외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금융회사 점포는 428개에 달한다. 그러나 진출 성적표는 좋지 않다. 총 수익에서 해외점포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은행은 평균 4.6%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금융회사인 씨티그룹은 54%에 이른다. 이에 금융사들은 해외 수익 확대를 위해 새로운 성장 시장인 동남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인도 등 총 11곳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의 점포는 156개다. 전체 해외점포의 36%를 차지한다. 베트남 진출 지점(48개)이 가장 많고 인도네시아(24개), 미얀마(20개) 등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강화된 최소 자본금 요건과 외국인의 지분율 제한은 금융사의 동남아 진출 의지를 꺾는 가장 큰 요인이다. 대표적으로 태국은 해외 은행이 200억 바트(6922억원)를 들고 와야 진입이 가능하다. 인도네시아의 최소 자본금 요건은 약 3000억원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해당 국가들의 경제·금융 활동 규모 등을 생각했을 때 자본규모 요건이 터무니없이 높다”며 “일본 미국 유럽 등 동남아 금융시장을 노리는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동남아 국가들 콧대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례도 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2∼3년 전 A국가와 은행 진출에 대해 논의하던 중, 금융 전산시스템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 승낙했었다”며 “그런데 해당 국가는 시스템 이용을 위한 전산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의 본심은 우리가 전산망 자체를 깔아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당시 국내 금융회사의 A국 진출은 무산됐다.

B국가의 경우 규정상 외국계 은행이 본국 은행 2곳 이상을 인수·합병해야지만 신규 진출이 가능하다. 금융권 한 임원은 “외국자본으로 자국 내 은행의 통폐합을 유도하는 것”이라며 “사실상 본국의 부실 은행들을 인수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시중은행 한 곳은 해당 조건을 받아들였고 올해 말쯤 현지법인을 열 예정이다. 해당 은행은 ‘작은 은행 두 곳을 인수했기 때문에 사업적으로 비효율적이진 않다’는 입장이다.

국가 간 신뢰 문제도 금융 협력을 좌우한다. 태국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만류에도 우리나라 금융회사가 철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2020년까지 한국 은행 진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나마 삼성생명이 보험업종이라는 이유로 태국에 남아 지난해 10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여기에다 국내 금융사 간 과도한 경쟁으로 내부 출혈이 발생한다는 점도 문제로 남아 있다. 또 은행들이 동남아의 높은 진입요건을 피해 주로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 대출) 사업 형태로 진출한 것에 대해 ‘고리 사채’와 다름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과 금융사들은 동남아 진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정상회담을 가질 때 금융회사 진입요건 완화 조항을 협상 대상에 넣어 달라고 청와대에 요청했다. 결과는 지켜봐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진입장벽을 낮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명구 KDB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태국 정부의 반감을 교훈으로 삼아 동남아 지역 진출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또 NH농협은행은 농업부문, IBK기업은행은 중소기업 분야 등 차별화 전략을 현지 진출 때 살려 내부출혈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규영 홍석호 기자 kyu@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