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여성 공무원 죽음으로 내몬 공직사회 회식문화

입력 2018-03-25 19:31 수정 2018-03-26 08:48

퇴근 후 “합류하라” 전화… 공적 회식 아니라는 이유로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해… 일각선 “정부 안일한 대처”
하급자 귀가 책임지지 못한 상급자 안전 불감증도 문제

여성 미혼 공무원이 퇴근 이후 상급자 술자리에 불려나갔다가 밤늦게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공무원은 공적인 회식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25일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실 등에 따르면 모 지방청에 근무하는 A씨는 지난 1월 18일 오후 4시쯤 대전에 있는 본청으로 출장을 왔다. 업무를 마친 A씨는 6시20분쯤 퇴근했다. 1시간쯤 후 본청에 근무하는 남성 상급자 3명이 저녁 술자리 도중 집에 있는 A씨에게 전화로 합류할 것을 권했다. 이들 중에는 A씨의 전직 직속상관도 있었다. A씨는 사전에 약속돼 있지 않았던 이 자리에 합류했고, 술자리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새벽 1시30분 먼저 귀갓길에 오른 A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량에 치여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국무총리실 공직기강관리관실은 최근 이 사고에 대한 경위를 파악했다. 총리실은 A씨가 참석한 저녁 자리는 공적 회식으로 보기 어렵다고 잠정 결론 내렸다. 공식 회식이 되려면 A씨가 소속된 부서나 A씨가 사고 당일 출장 갔던 부서 직원이 포함돼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총리실 관계자는 “공식적 회식이어야 공무원의 품위 등과 관련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다”면서 “사적 모임은 조사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해당 청의 감사담당관 역시 “개인적인 모임으로 파악됐으며 참석자 3명 모두 업무적으로 A씨와 전혀 관련 없던 직원들”이라고 설명했다. 공무원의 회식 후 귀가 중 사고는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해당 청은 이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무원연금공단에 A씨에 대한 순직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총리실과 해당 청의 사고 접근방식이 지나치게 안이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같은 부서에서 일한 전력이 있고 향후 함께 일할 가능성이 다분한 상급자와의 회식 자리를 사적 모임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 A씨는 사망 3시간여 전인 오후 10시쯤 가족에게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전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상하관계가 분명한 공직자가 하급자를 업무시간 외에 불러내 자정 넘어서까지 술자리를 가진 게 어떻게 사적인 모임일 수 있느냐”면서 “A씨의 참석 강제성 여부를 떠나 하급직원의 안전한 귀가를 책임지지 못한 상급자의 안전불감증도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부처 한 과장도 “수십년간 같은 부처에서 일해야 하는 상·하급자 간 순수한 사적인 모임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이번 사고가 공직사회의 잘못된 회식문화가 불러일으킨 사고라는 반응이다. 경제부처의 한 여성 사무관은 “공직사회가 ‘미투(#MeToo) 무풍지대’라고 하지만 밤늦게 노래방으로 불러내는 국·과장을 여럿 봤다”면서 “공직사회의 강제적 회식문화가 고쳐지지 않는 한 이런 불행한 사고는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