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김재천] 최대압박, 비핵화협상의 바트나

입력 2018-03-26 05:00 수정 2018-03-26 18:02

한반도에 다시 핵협상의 계절이 찾아왔다. 번번이 실패했던 과거 협상의 우를 답습하지 않고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북한 정권이 “핵은 결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입장에서 비핵화 협상도 가능하다고 돌변한 이유를 짚어봐야 한다. 일각에서는 북한 입장이 급변한 것이 아니라 잘 짜인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수소폭탄급 핵탄두와 다종의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핵무력 국가의 위치에 오른 북한이 이제는 경제에 매진해 핵·경제 병진의 완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력 국가의 자신감으로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면 비핵화 의지는 아직 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신감의 원천인 핵무력을 쉽게 포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대압박’이 경제를 곤경에 빠트려 생존을 위협, 북한 정권의 셈법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분석도 있다. 북이 드디어 핵·경제 병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핵과 경제를 교환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면 비핵화 협상은 의외로 순항할 수 있다. 어느 분석이 더 유효한지, 북의 비핵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경제에 대한 고려가 북한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역대급 제재가 레버리지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이전 협상이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는 평화협정 등의 체제보장 약속이 대북 설득 레버리지로 작용해 북의 셈법을 바꿔 비핵화의 길로 유도할 수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제보장이라는 인센티브는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유인할 레버리지로 미흡했다. 따라서 비핵화 의지가 결여된 상황에서 협상이 시작됐고, 협상 중에도 전략적 셈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역대급 제재와 군사위협의 디스인센티브(disincentive·역유인)가 북의 셈법에 변화를 초래했고 제 발로 비핵화 협상에 나오게 한 레버리지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체제보장은 비핵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지 북의 셈법을 바꿀 수 있는 지렛대는 아니다.

협상으로 합의가 난망할 때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 즉 ‘바트나(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가 있는 쪽이 협상에서 더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북한이 입장을 선회해 먼저 비핵화 대화를 제안했다는 것은 한·미가 최선은 아닐지언정 북한보다는 나은(better) 대안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협상이 파탄 나면 더 손해 보는 쪽은 북한이다. 북한은 다시 미래가 암울한 핵·미사일 외길로 가는 것이고, 한·미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최대압박을 지속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트나를 손에 들고 있다면 협상을 조금 느긋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협상은 시간에 쫓기는 쪽이 더 많이 내놓게 마련이다. 지금 아쉬운 쪽은 북한인데, 당장은 한국 정부가 협상에 더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다. 북핵 프로그램의 복잡성을 감안한다면 정치적 차원의 비핵화 일괄 합의는 가능할지 모르나 기술적 차원의 일괄 해결은 불가능하다. 비핵화를 체제보장과 맞바꾸는 ‘원샷 딜’을 해도, 결국은 이행 과정에서 선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려는 과욕보다는 어느 단계의 비핵화 과정에서 어떠한 보상을 하고, 단계마다 얼마큼의 시간을 할애해줄 것인지 한·미가 입장을 조율하며 치밀하게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은 비핵화 조건은 명확히 요구하는 반면, 정작 비핵화 과정에는 많은 모호성을 남겨놓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비핵화 로드맵과 타임테이블을 북에 제시해야 한다. 비핵화 과정의 검증은 타협할 수 없는 협상의 ‘이탈점(walkaway point)’이어야 한다. 한·미는 검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협상에서 이탈해 바트나를 택할 것이라는 점을 북에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최대압박은 한·미의 바트나이자 가장 확실한 대북 레버리지다.

김재천(서강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