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역한 선교사들이 펴낸 잡지 ‘코리아 미션 필드’에는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광고가 실려 있다. 내용이 흥미롭다. 사진스튜디오 광고부터 차와 커피, 설탕을 파는 수입상, 양복점과 카메라판매점 광고가 지면을 장식했다. 광고를 낸 주인공들이 1900년대 초반 서울에서 영업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난과 식민지배, 핍박 등 유쾌하지 않은 단어들로 가득 찬 시절에도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던 ‘모던한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역사의 색다른 편린이다. 이런 낭만적 분위기는 1910년 한일병탄을 기점으로 급변한다. 광고에 담긴 주소부터 일제히 일본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급기야 1919년 5월 9일 일제가 발표한 선전문이 선교사들의 잡지에 등장했다. ‘세계 평화를 향한 투쟁’이라는 글에는 “세계 평화를 지키고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 황실의 임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일제는 또 “일본 황실은 인류의 부모이고 전 세계의 머리 위에 황실이 있어야만 평화를 이루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궤변이나 마찬가지인 선전문구가 선교사들의 잡지에 실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1919년만 해도 선교사들 사이에선 청나라보다는 일본이 문명국가라는 인식이 강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이다보니 특히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게 이런 글이 실린 이유”라고 설명했다. 결국 선교사 사회가 일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교사들이 일제 강점기 내내 일제에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완공하면서부터였다. 선교사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었다. 조지 맥퀸이나 윌리엄 베어드 등은 신사참배에 극렬히 반대했다. 이 결과 베어드가 세운 평양 숭실학원은 폐교에 이르게 된다.
반면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신사참배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다. 일제의 핍박으로 오히려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선교사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당시 이승만이나 안창호 같은 인사들이 해외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교사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1933년 이후 일제가 국제연맹을 탈퇴한 뒤 벼랑 끝에 몰린다.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기약 없는 귀국길에 오르면서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을 꿈꿨고 실제 다시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도 많았다. 희로애락의 모든 기록들이 코리아 미션 필드에 솔직담백하게 담겨 있다.
한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건 결국 선교사들의 일상이 모인 결과다. 물론 그 일상은 좋은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격변기 선교사들의 고민과 일상이 사료로 남아 있다는 건 신앙의 후대들에겐 큰 행운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등 속에서도 긴밀히 협력했던 흔적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 파송 세계 2위의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선교지에서 이처럼 협력하고 있을까. 답은 늘 역사 속에 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교회 톺아보기] ‘코리아 미션 필드’의 기억
입력 2018-03-24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