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1> 이화순 선교사

입력 2018-03-24 00:01
이화순 선교사(점선)가 1984년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 대학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다.. 이화순 선교사 제공
1987년 봄 독일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수양회 때. 앞줄 맨 왼쪽이 이 선교사. 이화순 선교사 제공
1978년 독일 베스트팔렌 병원 근무 모습. 이화순 선교사 제공
이화순 선교사(왼쪽)가 1999년 독일 코른탈 선교신학대를 졸업한 남편 이이삭 선교사와 함께했다.
박경란 칼럼니스트
1960년대 파독 근로자는 시대의 소망이었다. 청춘은 가능성과 실재를 감지하지 못한 채 불나방처럼 미지의 땅을 향했다. 헌신은 헛되지 않았다. 남겨두고 떠난 곳에 희망이 됐다. 또 다른 꿈틀거림은 그곳을 향한 역(逆)선교였다.

대상은 기독교문화가 거대한 축을 이루는 독일 땅이었다. 복음의 불을 막 지폈지만 선교열정은 담대하고 뜨거웠다. 처음 평신도사역의 깃발을 든 것은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다. 69년 시작된 독일 개척사는 한국기독교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파독 간호사 선교사들은 촌음을 아껴 독일어와 말씀을 공부하고, 선교훈련을 받았다.

이화순(65) 선교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대학캠퍼스 제자양성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파독 간호사 모집에 응한 뒤 친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원래 독일행은 부모님의 빚을 결혼 전에 갚아드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세상을 향한 시각이 새롭게 열렸다.

하나님은 긍휼의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마음에 성령을 채워주셨다. 주님을 더 알고 싶어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했다. 그랬더니 한 달 뒤 선교센터에서 파송선교사로 훈련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독일 가기 전 6개월여의 훈련기간은 영적 서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삶의 이유가 ‘오직 예수’로 바뀌었다.

74년 7월 1일 독일 베스트팔렌병원에 오자마자 한인 간호사 10명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을 증거했다. 그중 두 명과 성경공부하며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당시 한인 간호사 중에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해 이 선교사가 근무하는 내과병동에 입원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소녀가 생면부지의 독일 땅에서 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과 언어 스트레스, 향수병으로 얼룩진 눈물은 어쩌면 그들 모두의 통증이었다.

“간호원장에게 그 자매를 저희 수양회에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자매랑 수양회에 참여했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시간이 됐어요. 하나님은 자매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회개와 은혜의 시간을 주셨죠.”

이후 그는 쉬는 날이면 인근 병원 한인 간호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4년 후 슈투트가르트로 이주하면서는 캠퍼스선교에 힘을 쏟았다. 근무하는 병원 건너편이 대학이었다. 쉬는 날에는 독일 학생에게 복음을 전했고, 휴가 때는 본부가 있는 쾰른에서 선교훈련을 받았다.

“기차를 타고 라인강변을 내려오는데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과 함께 제 마음에 비전을 주셨어요. 독일캠퍼스에 복음의 꽃이 피는 환상도 보여주시고요.”

28세 때 인생의 동역자를 만났다. 3주 휴가를 받아 한국을 방문하고 주님이 예비한 청주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형제와 결혼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독일캠퍼스 복음화에 비전과 믿음이 충만한 형제라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남편 이이삭 선교사였다. 남편은 독일에 온 후 컴퓨터 관련 공부를 하고 독일 첸트랄(Zentral)은행에 취업했다. 마가복음 말씀을 토대로 강의안과 문제지를 만들어 독일 학생들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다. 많은 독일 학생이 결단하고, 충성스러운 동역자로 세움 받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배장소가 비좁아 세 번이나 이사했다. 다른 도시 캠퍼스(호헨하임, 뷔르츠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를 개척하고 멀리 체코까지 선교사 가정을 파송했다. 결국 남편은 풀타임 사역을 위해 직장을 내려놨다. 이후 생계는 거의 이 선교사의 몫이 됐다. 이 선교사는 남편을 도와 캠퍼스 제자양육에 힘을 쏟았다.

남편은 신학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독일에서 복음적인 학교로 유명한 코른탈 선교신학대에 입학했다.

이후 부부는 선교에 매달렸다. 함께한 동역자와 거의 매일 성경공부와 새벽기도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에게 신경 쓰지 못해 마음에 상처를 안겨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창 복음에 불을 지필 때 첫째 딸이 태어났어요. 100일 즈음에 한국에 보내 시부모님께서 4년을 키워주셨는데 아이에게 상처로 남았나 봐요. 그때는 보내면서 하나님 손에 드린다 생각했는데 아픈 기억입니다.”

당시 UBF는 열정만 앞세운 지혜롭지 못한 사역과 율법적인 교만으로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고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지체들의 기도는 국제대학선교회(CMI)라는 새 그릇을 만들어냈다. 교회와 선교단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의 근원을 묵상했다. 영적 움직임은 2세들을 통해 구체화됐다. 대표적인 예로 YCC(Yes! Christ Camp)는 2세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영성캠프다.

부부는 지난해 12월까지 슈투트가르트 CMI 교회와 울름 한독교회를 동시에 섬겼고, 올해부터 슈투트가르트 CMI 교회만 섬기고 있다. 그동안 양로원의 간호사로 근무했던 이 선교사는 다음 달 간호사 옷을 벗는다. 간호사 생활 43년 만이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장 2절)

그는 퇴직 후 제자양성에 여생을 바칠 계획이다. 처음 부르심의 소명이 무엇인지 점점 더 깨달아간다는 이화순 선교사. 그동안 길러온 영적 자녀들이 그의 소명의 열매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