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등 많은 책 번역, 작품성 보여줘
“내년 3월까지 맡을 작품 이미 모두 정해져 있어요”
이 남자의 페이스북 상단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다랗게 적혀 있다. 도무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특이한 프로필이다. ‘대우증권에서 근무했음’ ‘대한항공에서 근무했음’ ‘한국외환은행에서 근무했음’ ‘중앙대 약학대학에서 공부했음’ ‘서울대 경영대학에서 공부했음’….
이토록 희한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은 과학책 번역으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양병찬(58)씨다. 출판계 안팎에서 그는 전문성과 필력을 두루 갖춘 번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3∼4년간 그의 손을 거친 작품만 하더라도 한두 권이 아니다. ‘센스 앤 넌센스’ ‘핀치의 부리’(이상 동아시아) ‘매혹하는 식물의 뇌’(행성B)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어크로스)…. 이들 책은 저마다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며 과학책 마니아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양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7일 출간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1933∼2015)의 유작 ‘의식의 강’(알마) 얘기부터 꺼냈다. 자신이 번역한 작품이었다.
“정말 좋은 책이에요. ‘의식의 강’을 번역하는 내내 이건 올리버 색스의 세계관이 담긴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쉽지 않은 책이지만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합니다.”
양씨를 만난 건 그의 독특한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1960년 인천에서 태어난 양씨는 30대 후반까진 평범한 삶을 살았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고, 대기업에 다니며 밥벌이를 했다. 90년대 중반엔 대학 선배들과 사업도 벌였다. 그러다가 99년 갑자기 진로를 틀었다. 중앙대 약대에 진학했다. 세는나이로 마흔 살이 되던 해였다.
“사업이 망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했어요. 약사가 되면 좀 평탄한 삶을 살 수 있겠더군요.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다행히 교사인 아내가 지원해준 덕분에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약대 공부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시험 ‘족보’를 외우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원서를 구해 읽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었죠.”
양씨는 2003년 대학을 졸업했고 이듬해 서울 구로구에 약국을 차렸다. 하지만 약학을 공부하면서 생긴 과학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그는 매일 새벽 과학저널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올라오는 글을 번역해 포스텍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사이트에 게재했다.
양씨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4년 어느 봄날, 과학책 출판 분야에서 유명한 동아시아의 한성봉 대표가 약국을 찾아왔다. 한 대표는 양씨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진화론 분야의 명저 중 하나인 ‘센스 앤 넌센스’였다.
“쉽지 않은 책이었어요. 6개월 가까이 번역에 매달렸었죠. 그런데 하다 보니 정말 재밌더군요. 약국 운영을 그만둔 것도 이때쯤이었어요.”
과학책 번역은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번역을 선보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과학 상식에 능통해야 한다. 어려운 내용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필력도 필요하다.
요즘도 그는 새벽 3∼4시에 일어난다. 해외 과학저널에 올라온 글들을 번역해 BRIC에 보낸다. 오전 8시쯤까지 이 일에 매달린 뒤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점심쯤에 기상해 오후 5∼6시까지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책을 번역한다.
출판계에선 그를 향한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요즘 매달리고 있는 작품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됐던 ‘아름다움의 진화’(가제)다. 그는 “내년 3월까지 번역할 작품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아내 덕분에 늦은 나이에 원하던 공부를 하며 새로운 진로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도 약대를 나왔어요. 아내는 내심 제가 다시 약국을 차려서 딸이랑 같이 운영하길 바라는 거 같은데 강요하진 않아요. 아내가 지금처럼 남편이 번역가로 살아가는 걸 용인해준다면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과학책 번역이야말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경영·약학 배우고 항공·은행 거쳐… 과학책 번역하는 남자
입력 2018-03-23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