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양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선과 악의 경계선이 인간 외부에 있지 않음을 간파했다. 선악을 가르는 기준은 이데올로기, 국경, 제도, 계층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체가 선악의 기준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약소국과 강대국, 중소기업과 대기업, 가난한 자와 부자,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에 선악의 경계선이 놓여 있지도 않다. 사람들은 선과 악을 나눌 수 있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성숙한 인간은 진실을 직면한다. 정신의학자 스콧 펙은 ‘그리고 저 너머에’서 인간은 “진리를 깨달아야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불평하고 싶어 한다. 정신질환의 원인은 문제와 그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려는 데 있다. 인간은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탄식했다. 경계선의 신학자 틸리히 말대로 인간의 곤경은 사람 안에 실재하는 어떤 집요한 마성적 힘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카이퍼의 말처럼 진리와 오류가 섞여 있지 않은 어떤 인간도 어떤 시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거대 공동체의 유익한 구성원이 되려면 이 문제를 직시하고 진실하게 다루어야 한다.
생각과 선호의 차이가 다툼으로 귀결되던 옛 대한민국이 아니라 새로운 합의를 향한 생산적인 출발점으로 나아가는 새 대한민국이 되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생각이 다르고, 형편도 다르고, 꿈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서로를 보듬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와 의견을 달리하거나 삶의 지향점이 판이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꿈쩍 않는 공통 기반을 복원하고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선은 너와 나 사이에 있지 않고 각자 속에 있다는 보편적 진리일 것이다.
바울의 말을 뒤집어보면 누구에게나 오류가 있지만 동시에 진실도 있다. 이러한 리얼리티에서 찾아야 할 공통의 토대는 서로가 그동안 지녀온 최선의 가치, 즉 개인의 책임과 사회의 정의를 각자 꺼내는 것이다. 아니 먼저 찾아주면 어떨까. 그러한 용기가 시스템이 되고 문화가 되고 숨 쉬는 공기처럼 된다면 어떨까. 그러려면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근원적인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그중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다양하게 지어진 소중한 생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공감대(consensus)다.
미국의 복음주의 사상가 짐 월리스는 세계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아주 오래되었지만 최근에 더 절실하게 요청되는 관념, 즉 공동선에 대한 모두의 헌신이 선결조건이라고 제안했다. 민주주의는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보수의 최선과 사회적 정의를 촉구하는 진보의 최선이라는 두 날개로 중심을 잡는 한 마리 새가 되어야 훨훨 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인간 본성을 직시해볼 때 진보와 보수는 선악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환대하며 만나야 하는 광장의 파트너가 맞다. 이 시대 각 분야는 인간과 사회를 깊이 성찰할 줄 아는, 바다처럼 그릇이 넓은 리더십에 목말라 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가.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려면 대한민국도 더 이상 연못이나 호수 같던 나라에 머물러선 곤란하다. 바다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Deep Change!
송용원 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송용원] 선과 악의 경계선 너머
입력 2018-03-23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