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어거스틴을 쫓아내는 교회 (2)

입력 2018-03-20 00:01

교회의 아버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은 오래도록 지적 방황과 편력을 거친다.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로 기독교에 기웃거리지만, 신통치 않아 이원론적 영지주의인 마니교로 귀의한다.

그가 기독교가 아닌 마니교로 떠난 것은 악과 고통의 문제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유일 신앙과 악의 존재라는, 양립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세상에 없는데,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악은 명백한 실재이니 말이다. 그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영원한 투쟁을 믿는 마니교가 마음에 들었다. 선과 악의 기원이 잘 설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회의주의와 플라톤주의를 거쳐 마침내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가 우회로를 거쳐 끝내 마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돌아온 것은 선의 승리 때문이다. 선과 악이 끝없이 대립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희망이 없다. 선과 악이 언제까지나 투쟁한다면, 선이 이긴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반면 다른 여타의 신과 달리 기독교의 신은 고통을 알고 경험하신 분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고통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로 돌아왔다.

오늘의 교회는 어거스틴과 같은 구도자들이 던지는 세상의 고통에 대한 질문에 답이 되고 있을까. 1980년대 대학은 몸살을 앓았다. 80년 광주가 안긴 물음과 그때 남은 상처는 실로 깊었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개인적 판단이지만, 운동권 학생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착하디착한 신자였던 젊은이들이 신앙을 많이 잃었다.

나는 그때 둘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무던히 시달렸다. 나는 데모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학습했다. 매일 큐티하고 제자훈련을 성실히 받았던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운동권이었기에 교회 중심부에 들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복음의 진리와 역사의 진실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에 대한 궁극적 대답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왜 기독교인들이, 정확히 말하자면 한때 기독교인이었던 이들이 운동권에 많았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고, 복음을 벗어던지게 했을까. 그들은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고, 그리하여 이웃을 위하여 내 한 몸을 십자가에 드리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러나 교회가 실제로는 사회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강자와 부자의 편에 서고 약자와 빈자를 홀대한다는 아픈 사실에 당황하고 당혹스러웠다. 그 실망감 속에서 한국 사회의 왜곡과 질곡에 대한 대답을 마르크스가 준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기독교로는 이 사회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친구들은 도달했던 것이다.

로고스서원 글쓰기 학교에서 어느 집사님이 청소년기를 회고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존경하는 목사님의 아들은 신앙심도 돈독했고 외모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올곧았다. 그가 소위 명문대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고, 끝내 신앙을 저버리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줬다. 그 집사님은 ‘그 오빠가 학생운동에 투신한 까닭은 신앙과 그의 착한 심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설교에 순종했는데, 정작 그렇게 살려고 하니 교회는 그들이 서 있을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고아와 과부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이 듣고 해방하셨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기에 우리 시대의 노동자와 농민, 빈민의 울부짖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때 한국교회는 아픈 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교회라면 질색하고 외면한다.

하지만 떠나갔던 어거스틴이 결국 돌아왔듯이, 우리 시대의 어거스틴들 또한 되돌아올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때의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노예들의 종교였고, 그러했기에 로마를 변혁할 수 있었다. 오늘의 교회가 마음 상한 자를 보듬지 않는다면 미래의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교회 밖을 떠돌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결정해야 한다. 어린 어거스틴을 만들어 계속해서 내쫓을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자라 어른 어거스틴이 되는 것을 볼 것인지를.

김기현(로고스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