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용기] “나도 내 소리 내봤으면”

입력 2018-03-17 00:01 수정 2018-03-18 17:34
픽사베이
서울 도심의 한 공사장 외벽에 ‘미투(#MeToo)’ 운동을 의미하는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뉴시스
지난 8일 서울 명동에서 미투 운동 동참을 뜻하는 검은색, 보라색 옷을 입은 한국YWCA 회원들이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장미와 미투 운동 지지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뉴시스
도움말 - 이무석 박사(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
인간은 가치 있는 일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두려움’이란 용기를 내게 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맞설 각오를 하는 것이다. 고로 용기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공산주의 독재 치하에서 인권과 자유를 외치다가 투옥된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다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쓰여 있는지 세어 봤다. 366번이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이 많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눈물’이 ‘용기’가 되길

영국 BBC방송 등 해외 언론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던 ‘미투(#MeToo)’ 운동이 이제야 한국에 상륙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 한국사회가 ‘너도 책임 있어’ ‘왜 그때는 아무 소리 없다가 이제 와서’ ‘거기에 가지 말았어야지’ 등의 2차 가해로 피해 여성들을 침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직장 내 성희롱 상담자 23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가운데 57%가 피해자임에도 폭로 이후 불이익 조치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당한 불이익은 파면이나 해임 등 신분상 불이익뿐 아니다. 53.4%의 응답자가 집단 따돌림과 폭행, 폭언 등으로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

전문가들은 “이제 피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됐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며 “지금은 혼란스럽지만 성숙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라고 진단한다.

미투 운동에 참여한 피해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증언이 누군가에게 용기가 될 것으로 생각해 고백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한 미투 운동 토론회에서 J씨는 “누군가는 왜 이제야 이런 사실을 폭로하느냐고 말하지만 30년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그 일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눈물’이 누군가의 ‘용기’가 되길 바란 것이다.

최고의 치료약은 ‘공감’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에서 이무석 박사를 만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심리적 특징과 치유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는 한국정신분석학회장과 전남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정신분석에로의 초대’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30년 만의 휴식’ ‘자존감’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한국의 대표적인 정신분석가다.

그는 “가해자들은 심각성을 잘 모르는데 피해 여성의 후유증은 평생을 간다”고 했다. “성폭행은 주먹으로 맞은 폭행보다 훨씬 트라우마가 심합니다. 신체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10이라면 성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100 정도로 상처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자신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해 심한 수치심과 열등감에 빠져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가해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끼지만 주변의 반응이 두렵고 자기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잊으려 하고 묻어두려고 노력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정도가 약해지지 않는 것이 성폭행 피해자의 심리적 특징입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밝혀진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치계 등의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그 분야의 ‘절대 권력’이었다. 권력형 성추문은 폭력이나 협박 없이도 희생자를 정신적으로 착취한다. 대의명분이나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세뇌하는 집단 분위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이단(異端)과도 같다. 신흥종교의 교주는 도덕적인 원리로 지배되는 ‘초자아’가 약하다. 죄책감을 못 느끼며 자기애(나르시스틱) 집착이 심하다. ‘나를 위한 타인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들은 대체로 차갑고 이기적이며 출세지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피해자들이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나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를 공감해주는 치료적인 사회가 필요하다. 최고의 치료약은 ‘공감’이다. 이 박사는 성폭력 피해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위로받을 때 효과적으로 회복된다고 했다. “용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난 이만하면 괜찮다’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할 때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지며,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생진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마음의 병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치유가 시작된다고도 했다. “산은 산에게 주고/ 강은 강에게 주었으면/ 나팔은 나팔수에게 주고/ 파리 목숨은 파리에게 주었으면/ 그리고 나머지 것들도 다 찾아간 다음/ 나도 내게 주었으면/ 방울 소리 방울에서 나고/ 파도 소리 파도에서 나듯/ 나도 내 소리 내 봤으면.(이생진의 시 ‘나도 내 소리를 내 봤으면’)”

나의 목소리를 찾으려면

이 박사는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려면 자기발견(자기수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기를 발견하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 남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때만 용기를 얻습니다.” ‘나는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기긍정이란 어떤 일을 할 수 없으면서도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다. 자기수용은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변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타인을 신뢰하며 누군가를 위해 공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박사는 두려워할 만큼만 두려운 것이 용기이고, 무섭지 않은 것을 과도하게 무서워하는 것은 겁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대상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대상을 무시무시한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직시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용감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거대해 보일수록 나는 왜소해집니다. 내가 왜소해 보일수록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 박사는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자존감이 낮을 뿐 아니라 용기도 낼 수 없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낸 여성들의 용기와 결단엔 응원을 보내줘야 한다. 그들은 여성의 ‘인권’과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기희생의 대가를 지불한 이들이다. 그동안 홀로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그냥 보듬고 울어주자.

그러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여성이 아직 더 많을 것이다. 말할 수 없다고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느리더라도 달팽이처럼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가장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출발이다.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대시간’이 필요하다. ‘아직도 거기 매달려 사느냐’는 말로 상처주지 말아야 한다.

치유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가 형벌을 받았다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전문 치료기관과 치료사를 찾아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용기에 하나 더

용기의 시작은 ‘자아 발견’
설령 완벽하지 않아도…


‘자아 발견’이란 자기 자신의 상태와 존재이유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환경과 조건에 처해 있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가지며, 자신의 이상이 무엇인지,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를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아를 발견하면 자신이 시시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말할 수 있게 되고 생각보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무석 박사는 용기를 내려면 자아 발견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은 이 박사가 제안한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방법이다.

나를 올바로 비춰주는 ‘거울’을 찾아야 한다. 나의 감정을 그에게 말하고 그가 비춰주는 나를 봐야 한다. 나의 장단점을 모두 알면서도 마음 깊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친구, 가족, 상담가 등 지지그룹을 통해 이런 만남이 이어지면 마음에 건강한 거울이 생긴다. “완벽하지 않아도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할 때 용기를 낼 수 있다.

또 나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감정일기’를 써본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감정 경험이 있다면 기록해 본다. 내 마음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기록한다. 개인정신분석이나 목사님의 설교, 책읽기를 통해서도 자아를 성찰할 수 있다.

자신을 돌보는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하고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동시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없어서 조바심이 날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본다.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자. 그리고 천천히 해보자.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어떤 일에 성공하거나 잘 끝내면 자신에게 상을 준다. 맛있는 것을 먹어도 좋고 평소에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는 것도 좋다.

학벌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학벌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는 부끄러운 인간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학벌 한 가지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어린 시절 상처받을 정도로 패배한 경험이 있는지 떠올리며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채운다면 그것이 건강한 인생이다.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