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닉슨을 법정에 세웠더라면

입력 2018-03-16 05:05

1974년 7월 미국 하원 사법위원회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안을 통과시킬 때 인정한 사유는 사법방해, 권한남용, 의회모독이다. 당초 하원에 제출된 탄핵 사유는 다섯 가지였다. 의원들은 그중에서 캄보디아 폭격 문서 위조와 정치자금 불법 수수 및 탈세는 탄핵 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탄핵과 형사 처벌은 별개의 문제였다. 자진사퇴를 거부하던 닉슨의 발목을 잡은 것은 탄핵 사유에서 빠진 탈세와 불법 정치자금이었다. 닉슨이 사임한 뒤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은 자서전에 “당시 알렉산더 헤이그 비서실장을 비롯한 닉슨의 참모들이 기소면제를 조건으로 자진사퇴 카드를 제안했다”고 적었다. 실제로 포드는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지 1개월 만에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면(a full and unconditional pardon)’을 발표했고 닉슨에 대한 모든 수사는 중단됐다.

그렇다면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던 닉슨의 탈세와 불법 정치자금 규모는 얼마나 될까. 수사가 중단됐으니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닉슨 사임 직후 제기된 워터게이트호텔 불법 침입 관련 민사소송에서는 1968년 대선을 치르면서 닉슨이 약 50만 달러를 탈세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세청은 이를 근거로 닉슨에게 47만여 달러의 세금고지서를 발송했다.

1976년에 드러난 사실도 있다. 다국적 석유기업 걸프사는 주주들로부터 공금을 유용했다는 소송이 제기되자 닉슨 선거캠프로부터 10만 달러를 돌려받았다.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통해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실이 드러났기에 어쩔 수 없이 회수에 나선 것이다. 닉슨은 1946년 하원의원, 1950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2년 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됐다. 그의 정치 경력을 볼 때 특별검사가 사임하지 않고 수사를 계속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다.

포드가 닉슨 사면을 발표하자 더러운 거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기소 면제는 불법도 권한남용도 아니기에 포드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신 임기 내내 이 문제로 비틀거리다가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지미 카터에게 패했다. 정치적 책임을 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국민의 법 감정도 다르다. 법을 어긴 사실이 드러났는데 기소하지 않으면 검찰에 직무유기 책임을 묻는 게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결국 검찰에 소환됐다. 퇴임한 지 1844일 만에 검찰청사 포토라인에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21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공소장에 기재될 주요 혐의는 횡령, 배임, 조세포탈, 뇌물수수다. 측근들을 구속할 때 이 전 대통령을 주범이라고 못 박은 검찰로서는 영장을 청구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1심 선고를 기다리는 상황이 매우 부담스럽지만 이 전 대통령이 혐의를 모두 부인했으니 법대로 갈 수밖에 없다. 외통수다.

법을 어기고 국민을 속인 이 전 대통령에게 화가 난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런데 분노의 감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뒤 검찰청사로 불려온 게 벌써 다섯 번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더 짜증스럽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납세 자료 공개를 거부했을 때 미국의 주요 언론은 일제히 닉슨을 불러냈다. 당시 닉슨을 끝까지 수사했다면 제도가 바뀌었을 것이고, 다국적 기업이 거액을 기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행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칼럼이 쏟아졌다.

그 논리대로라면 전직 대통령 다섯 명을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운 우리나라는 무엇인가 달라진 게 있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에 나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바뀐 게 없다. 정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법의 언어로 해결하려 한 탓일지 모른다. 이래서는 외통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