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노숙인 자립률 82%… 가족 같은 관심이 ‘자활 기적’ 낳았다

입력 2018-03-15 00:01
노숙인들이 14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다시서기 서울역 진료소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가족처럼 잘 대해줘서 자주 신세를 져.”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자동 ‘다시서기 서울역 진료소(소장 여재훈 성공회 신부·사진)’에서 진료를 받은 노숙인 지모(62)씨의 말과 표정에서 어색함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소화가 안 되고 신물이 올라와 이곳을 찾았다. 진료소는 지씨 같은 노숙인만 대상으로 진료하는 정식 의료기관으로, 대한성공회가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지씨는 최근 진료소에서 실시한 혈액검사에서 간수치가 높게 나와 서울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건강을 돌봐주는 가족이 없는 노숙인은 진료소에서나마 건강검진으로 질환을 미리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노숙인의 1차 의료기관’ 성격이 짙다.

진료소를 찾는 노숙인은 하루 평균 100여명. 서울역 13번 출구 바로 앞에 있지만 아직도 이곳을 모르는 노숙인이 꽤 있다고 한다. 공중보건의인 최현민씨는 “변비를 참다가 대장에 용종이 생긴 분도 있고 신발을 안 벗어 발이 썩어 절단한 분도 있다”며 “미안하다며 찾아오지 않는 이도 많은데 질병 유무를 체크하고 치료하려면 1차로 진료소를 찾아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진료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는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가 있다. 대한성공회가 위탁 운영하는 이곳에도 노숙인이 많다. 이날도 바둑을 두거나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3개층은 침실로 사용하는데 매일 150명 넘는 이들이 잠을 청한다. 이들은 센터에서 숙식하며 수시로 취업과 주거 자활의 정보를 얻게 된다.

지난해 서울시로부터 1∼6개월간 임시주거지원을 받은 노숙인 1045명 중 861명(82.3%)은 주거지원이 끝난 이후에도 자립했다. 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생활했던 노숙인들의 ‘노숙인 탈출 비율’도 81.8%에 달했다. 576명 가운데 471명이 노숙인 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비결은 뭘까. 가족처럼 관심을 가지니 변화가 생겼다는 게 센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숙인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고 수목원을 함께 산책했다. 주민등록을 복원해주고, 구직 활동도 함께했다. 김정용(40) 팀장은 “노숙인을 둘러싼 생활환경에 문제가 있을 순 있어도 그들이 삶의 의지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다.

센터와 진료소에 십자가는 걸려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전도행위는 일절 없다. 그런데도 여 신부에게 예배를 부탁하는 노숙인이 하나둘 생겨났다고 한다. 여 신부는 20여명을 모아 센터 근처의 작은 공간에서 성찬례를 집전하고 인문학 교실을 열고 있다. 여 신부는 “예수님께서도 병을 고치거나 먹을 것을 나눌 때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다”며 “센터를 잘 운영하는 게 그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앙 활동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센터 가족들의 정성은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30대 노숙인은 사업이 망해 빚을 지고 이곳을 찾았다가 새 직장과 임대주택을 얻은 뒤 여 신부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가족과 헤어진 채 알코올 중독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한 50대 노숙인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춘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센터를 찾는 노숙인들이 모두 ‘예비된 기적’이라고 여 신부는 말한다. 그는 “제대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노숙인이 많다”며 “지붕을 뚫어 중풍 걸린 이를 예수께로 데려갔던 친구들처럼 노숙인에게도 관심 두는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