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장만 읽어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 책이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지를. ‘화염과 분노’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트럼프를 완전히 깔아뭉개버리는 문제작이다. 백악관에서 벌어지는 암투의 스토리까지 들려준다.
지난 1월 5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미국 정가를 들쑤셔 놓았고 현지 서점가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난겨울 워싱턴 서점들은 이 책을 사려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현지 매체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해리포터 이후 이런 열풍은 처음이라고.
출간 1주일 만에 이 책은 미국에서만 140만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판권은 35개국에 팔렸다. 그리고 지난 12일, ‘화염과 분노’는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그동안 책에 실린 주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많이 보도된 만큼 새로울 게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492쪽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상당하다. 자극적인 에피소드, 거침없는 조롱, 화끈한 유머가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일단 책의 탄생 과정부터 살펴보자. 저자 마이클 울프(65)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그는 정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위대한 전환’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준비한다고 속여 취재를 시작했다. 책에 담긴 문구를 그대로 옮기자면 “(백악관) 벽에 붙은 파리와 같은 고정적인 침입자”가 돼서 백악관에 드나드는 인물 200여명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트럼프와 그의 선거를 도운 캠프 관계자들은 모두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선거대책본부장은 트럼프의 패배를 “확신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더라도 이긴 선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대선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로 거듭났으니까.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다. 당선이 확정됐을 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처음에 어리둥절하던 트럼프는 믿기지 않는 트럼프로 바뀌고 다시 매우 겁에 질린 트럼프로 변했다. 그러나 마지막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트럼프는 자신이 미합중국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고 그럴 만한 완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남자로 바뀌었다.”
책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은 스티브 배넌이다. 배넌은 대선 캠프의 최고 책임자였고, 선거 이후엔 백악관에서 수석전략가로 활동한 트럼프의 복심이었다. 저자는 배넌을 중심으로 트럼프의 딸인 이방카,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등이 벌인 복마전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책에는 “트럼프의 백악관에서 일하면서도 정상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성장하고 있는 극우 세력을 향한 저자의 우려도 담겼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트럼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인물인지 전하는 대목이다. 예컨대 트럼프는 독살을 당할까봐 “음식이 미리 안전하게 만들어져 있는” 맥도날드를 즐겨 찾는다. 그러면서 이런 혹독한 평가가 등장한다 “배넌은 트럼프를 단순한 기계로 묘사했다. 아부를 잔뜩 하면 스위치가 켜지고 비방을 퍼부으면 꺼지는 기계라는 것이다.”
돋보이는 건 저자의 필력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하려는 메시지를 ‘팩트’를 기반으로 하나씩 쌓아올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독자들은 저자가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맹렬하게 취재에 매달렸을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책에 담긴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를 두고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확실한 건 절반만이 ‘팩트’라고 해도 트럼프는 엄청난 문제아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정독해야 할 사람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일 수도 있겠다. 그는 오는 5월이면 트럼프와 독대해야 하니까 말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은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듯하다. 트럼프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라인스 프리버스는 비서실장에 발탁되기 전 트럼프의 친구를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와 한 시간 동안 만나면 자네는 54분 동안 그의 이야기들을 들을 테고 그는 같은 이야기를 다시 또 다시 되풀이할 걸세. 따라서 자네는 주장할 걸 딱 한 가지만 갖고 가서 할 수 있을 때 언제든지 들이밀어야 하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책과 길] 주변인 200여명이 밝힌 트럼프의 민낯
입력 2018-03-16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