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성폭력 근절 대책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가 최근 한국 정부에 내놓은 여성 인권 관련 8차 최종권고안에 크게 미달한 것으로 나타났다(국민일보 3월 13일자 1면 참조). 정부는 지난달 CEDAW 최종 심의에서 성폭력 문제 대응을 위한 핵심 조치 사항을 지적받은 뒤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와의 인식의 괴리가 큰 셈이다.
CEDAW는 한국의 사법제도가 강간을 대하는 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봤다. CEDAW는 강간을 정의할 때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둬야 한다고 권고한다. 지난해 7월 발표된 CEDAW ‘일반권고 35호’에도 이미 “가입국은 강간을 포함한 모든 성범죄를 개인의 안전과 신체적, 성적 및 정신적 완전성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해야 한다. 성범죄는 자율적인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한국 형법은 여전히 폭행이나 협박이 입증돼야만 강간으로 인정한다. CEDAW는 이 때문에 피해자가 일찌감치 겁먹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거나 신고를 하더라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13일 “국제기준에 명백히 나와 있는 내용을 한국 정부는 알면서도 지키지 않은 것”이라며 “강간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개정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법을 개정해 협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다.
CEDAW는 또 이번 권고안에서 사제관계 성희롱·성추행이 만연하다는 점도 직접 언급했다. 권고안은 ‘학교와 군대 등 공공기관에서는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더 엄격한 처벌을 내리고, 같은 직장에 다시 복귀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기소로 이어지는 경우가 현저히 적고 벌금형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중소기업에서 성폭력 예방에 초점을 둔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마련하라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여성가족부가 지난 8일 발표한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강간죄 구성요건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CEDAW 최종권고안은 지난달 이뤄진 제8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근절 대책 발표 전에 이미 이런 지적을 받았지만 정책엔 반영하지 않은 셈이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정부는 처벌 강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만 했다.
손명희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는 “처벌뿐만 아니라 신고와 수사, 재판 과정에서 이뤄지는 각종 2차 피해 문제가 심각한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라며 “CEDAW의 권고를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윤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도 “성희롱 무료 교육 등은 실질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정책”이라며 “정책 구상 과정에서 현장에서 성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이재연 황윤태 기자 jaylee@kmib.co.kr
현행법 ‘강간죄 정의’ 유엔도 꾸짖다
입력 2018-03-14 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