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의 신년사가 시작이었다. 김여정 방남, 김영철 방남, 정의용·서훈 방북, 4월 남북 정상회담 합의, 정의용·서훈 방미, 5월 북·미 정상회담 합의까지 이뤄졌다. 언론이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전이었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힘든 다이내믹 한반도다.
주인공 김정은은 지난 40여일간 시종 통 큰 모습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지만, 불가능해보였던 비핵화 대화가 시작되려 한다. 김정은은 우리와 미국의 요구에 화끈하게 답했다. 평창올림픽 참여를 요청하니, 여동생인 김여정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선수단·응원단을 내려 보냈다. 비핵화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니, 비핵화 대화를 하겠다고 답했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축소·연기할 수 없다고 하니, “이해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김정은은 한국과 미국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와 미국의 까다로운 조건을 대폭 수용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이런 식의 협상은 불가능하다.
김정은은 왜 이러는 걸까.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북한이 전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제 미국과 한국이 답할 차례다. 그게 수순”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정상회담과 비핵화 대화 수용이라는 카드를 보였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그에 화답하는 카드를 보여줄 차례라는 의미다. 김정은이 요구조건을 말하지 않은 것은, 한국과 미국의 제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끈하게 줬으니, 화끈하게 내놓으라는 뜻이 숨어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김정은은 꽤 비싼 제안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국민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9·19 공동성명이나 6자회담 틀 안에서 나왔던 대북 보상책은 이제 과거의 것”이라며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다 가졌다. 그에 걸맞은 인센티브가 무엇일지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특보는 “북한의 (비핵화 관련)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가를 준비해야 한다. 막연하게 준비해서는 판이 깨지기 쉬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북한이 핵 시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약속받은 것은 경수로 2기와 중유였다. 2005년 6자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이 체결됐다. 북한에 조금 더 많은 대가가 제공됐다. 북한의 핵무기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 계획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경수로는 물론 전력을 받기로 했다. 더불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과 침공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두 합의는 모두 파기됐다. 2005년 이후 13년이 지났고, 다시 대화가 시작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술은 “완성됐다”고 주장할 정도로 발전했다. 북한에 제공할 대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김정은은 앞으로 2개월간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 3대 세습 체제를 지키고, 김정은이 북한 주민에게 약속한 경제 발전을 이뤄내기 위한 요구들일 것이다. “비핵화 대화에 나서겠다”는 김정은의 말을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겠다”고 읽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대화는 지금부터다. 북한은 핵을 지키며 최대한 대가를 얻으려 할 것이고, 한·미는 핵·미사일을 폐기시키고 합리적 대가를 지불하려 할 것이다.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한 대화이다. 그래도 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협상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차악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대북 인센티브가 모두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협상을 통해 핵무기를 묶어두고, 장기적으로는 핵 폐기를 유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북한에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북한의 시장을 발전시키고, 이것이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돌파구가 되는 그림을 그려내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한 때다.
남도영 정치부장 dynam@kmib.co.kr
[돋을새김-남도영] 김정은이 말하지 않은 것들
입력 2018-03-12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