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5년간 치열한 권력투쟁 끝 장기집권 쟁취

입력 2018-03-12 05:03
중국 베이징에서 지난 2일 시진핑 국가주석의 얼굴이 인쇄된 홍보물 앞으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시 주석은 11일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없앤 개정 헌법 통과로 마오쩌둥 이래 최고 권력자로 입지를 굳혔다. AP뉴시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종신집권 시나리오에서 최종 관문을 넘어섰다. 중국이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시진핑 사상’을 명기하고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삭제한 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시 주석은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권력 기반을 다졌다. 후계자도 지정하지 않고, 정적들도 대부분 제거해 ‘황제’급 절대 권력자 자리를 굳히게 됐다.

시 주석이 무소불위의 ‘시(習)황제’로 군림하게 됐지만 애초 그를 최고 지도부로 이끈 것은 중국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다. 시 주석이 저장성 서기로 근무하던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 상하이시 서기가 낙마하면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장쩌민 전 주석의 뒷배를 믿고 오만했던 천량위는 최고 지도부의 눈밖에 나면서 부패혐의로 낙마했다. 이어 후임을 두고 상하이방과 공청단이 계파 싸움을 벌이다 결국 제3지대의 시 주석이 어부지리로 낙점됐다. 2007년 3월 상하이 시장에 부임한 시 주석은 영국식 호화 사택을 거부하고, 출장길에는 직행 전용열차 대신 버스를 타는 등 청렴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어 그해 10월 22일 17차 공산당대회에선 ‘후진타오 후계자’로 유력했던 리커창을 누르고 국가 부주석으로 차기를 예약했다. 상하이방과 공청단의 치열한 권력 암투와 그 폐해를 지켜본 시 주석은 강력한 통치 기반을 다져나갔다.

2012년 말 당 총서기에 오른 시 주석은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우며 부패와의 전쟁도 시작했다. 부패와의 전쟁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손색이 없었다.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총대를 멨다.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 궈보슝·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이 줄줄이 낙마했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쑨정차이 전 충칭시 서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기율위는 시 주석 집권 1기 5년간 차관급 280명, 국장급 8600명을 부패 혐의로 적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비리로 처벌받은 군 간부는 1만3000명에 이른다.

반부패 드라이브는 시 주석의 장기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한 포석이었다. 정적들을 제거한 시 주석은 헌법에 ‘시진핑 사상’을 삽입하고 임기 규정도 철폐하면서 국가주석에 오른 지 불과 5년 만에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시 주석이 장기집권에 집착하는 것은 공산당 내 권력투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전임 후진타오 주석은 집권 기간에 줄곧 장쩌민과 상하이방에 휘둘렸다. 장쩌민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퇴임 후에도 한동안 내놓지 않으며 후진타오를 괴롭혔다.

그러나 시 주석은 마오쩌둥 시절 1인 독재의 폐해를 막기 위해 덩샤오핑이 마련한 ‘집단지도체제’나 ‘격대지정’(조기 후계자 지정) 등 권력 견제 시스템을 모두 폐기하며 암울한 과거로 회귀했다. ‘시진핑 1인 천하’가 구축되면서 독재를 막을 견제장치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대약진 운동으로 수천만명이 굶어죽고 문화대혁명으로 피바람이 불었던 마오쩌둥 시절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