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2000년 말 추진됐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정상회담이 불발된 이후 18년 만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오는 5월 얼굴을 맞대면 한꺼번에 많은 의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북·미 관계 흐름은 18년 전과 매우 닮았다. 남북 관계 해빙 분위기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수순이 그렇다. 북한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북·미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북한은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 4개월 만에 서열 2위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미국에 특사로 보냈다. 조명록은 군복 차림으로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의 ‘평양 초청’ 서한을 전달했다. 이번엔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그 역할을 했다.
조명록 일행이 워싱턴을 떠난 직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아 김정일을 만났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아무 진전이 없던 북·미 간 북핵 대화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가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해 11월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클린턴의 방북은 결국 무산됐다.
당시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 중단의 대가로 경제적 보상보다는 대미 관계 개선에 무게를 뒀다.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조치로 여겨졌다. 불량국가 이미지를 벗고 합법적인 주권 국가임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9일 “김정은이 대북 특사단을 통해 ‘대화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고 한 것은 정상국가로 인정해 달라는 의미”라며 “과거나 지금이나 북한에 대미 관계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북·미 대화는 합의와 파기의 연속이었다. 북핵 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대화를 모색했다가 합의문에 서명한 뒤에는 서로 상대 탓을 하며 파기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을 때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과 북·미 고위급 회담을 거쳐 제네바 합의가 도출된 게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2002년 10월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북·미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이후 북핵 문제는 남북과 미국 외에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 틀에서 다뤄졌다. 2005년 북핵 해결 로드맵이 담긴 9·19 공동성명이 도출됐지만 이 역시 미국의 대북 제재와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이후로도 북·미는 대화 채널을 아예 닫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북·미 고위급 회담은 2012년 2월에 열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글린 데이비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2·29합의를 이뤘지만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으로 다시 파기됐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北美 회담의 역사…클린턴? 김정일 만남 코앞서 불발
입력 2018-03-10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