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특사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8일 미국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미국의 안보·정보 책임자 및 대북 관련 부처 장관들을 만나고 백악관에도 들른다. 미국의 대북 대화 의지를 확인하고 방법과 속도를 논의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대민국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손잡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초석을 놓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ICBM 개발 이후 북핵 문제를 우리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정 실장과 서 원장의 방미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행동으로 옮기는 첫걸음이다.
북·미 대화의 여건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김정은은 비핵화를 의제로 한 협상과 핵·미사일 도발 중단 의사를 밝혔다. 미국이 제시한 대화 시작의 전제조건은 일단 충족된 것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할 김정은의 메시지까지 있으니 미국이 북한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높다. 무력충돌까지 걱정했던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한반도 평화 정착을 향한 놀라운 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의 속마음이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다. 대북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김정은의 말이 비핵화 의지를 표현한 것만은 아닐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이유를 미국의 위협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대북 군사적 위협 해소라는 조건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라는 북한의 판에 박은 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2008년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고 실리를 챙긴 뒤 약속을 걷어찬 것처럼 북한이 언제 말을 뒤집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행동을 지켜보겠다”고 말한 것은 북한의 말바꾸기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하겠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역시 신중해야 한다. 북·미 대화와 우리의 중재 노력 자체를 폄훼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가능성에 철저하게 대응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기까지는 문 대통령의 말처럼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그 고비를 넘기는 힘은 동맹국인 미국과의 정교한 조율과 빈틈없는 공조에서 나온다. 정 실장 일행이 방미기간 중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분위기에 취해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대북 제재의 틀을 흔드는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북한에게 시간을 줄 뿐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을 북·미 대화의 속도에 맞춰야 하는 이유다.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완화됐다지만 이제 대화의 시작을 논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설] 정의용 실장과 서훈 원장이 미국에서 해야 할 일
입력 2018-03-08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