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지음/박소영 옮김/오월의봄/696쪽/3만4000원
강간의 역사를 집대성한 책 같은 것은 읽고 싶지 않았다. 미개한 어느 시대에 이런 일도 다 있었다니 하는 속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을 게 분명해서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은 ‘미투 운동(#Metoo·나도 당했다)’이 격렬한 시점에 성폭력의 정점에 있는 강간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떻게 자행돼 왔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책은 페미니스트 수전 브라운밀러의 1975년 저작으로 페미니즘 연구서의 고전이자 베스트셀러다. 우리나라엔 올해 완역본이 나왔다. 놀랍게도 43년 전 저자가 비판했던 내용이 현 시점의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된다. 성폭력을 둘러싼 담론은 4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쟁적이고, 비약적인 변화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강간을 정의하면 한 문장으로 가능하다.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면 그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정의는 온전히 적용되지 않고 있다.
성폭력의 역사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시작됐다. 신체구조상 여성은 언제든 남성에게 강간당할 수 있고, 자신이 당한 방식 그대로 남성에게 복수할 수 없다.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남성’과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이라는 구도가 이렇게 만들어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하게 했다. 다른 남성의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아버지, 형제, 남편, 부족은 여성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저자는 여성을 “인류 최초의 부동산”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표현이 불편할 수 있다. 표현의 과격함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을 꼬집는데서 오는 불편함에 더 가깝다.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이뤄진 역사를 보면 이 불편한 사실이 단번에 와 닿는다. 예컨대 11세기 영국에서는 강간범에게 사형 또는 신체절단형이라는 극형을 내렸다. 다만 조건이 따랐다. ‘강력한 귀족의 보호 하에 살던 지체 높고 부유한 처녀를 강간한 경우’로 제한됐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부유한’이다. ‘강간=극악무도한 절도’로 다뤄졌다. 성폭력에 의한 피해가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게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한 것은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효한 관점이다.
모든 강간이 잔혹하고 악랄하지만 전쟁 중 강간은 그 최상위에 있다. 전쟁 중 성폭력은 ‘정복자의 행위’로 취급됐다. 정복자의 힘을 과시하는데 성폭력의 피해는 참혹할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전쟁 중 성폭력 유형은 윤간이 보통이다. 윤간은 피해자의 인격을 짓밟는 극도로 모욕적인 형태의 폭력이다.
강간은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도구로도 쓰였다. 책은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해 이를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남자는 전쟁을 위해 훈련받아야 하며 여자는 전사의 즐거움을 위해 훈련받아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한국 중국 등의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던 게 그 예다.
다행히 책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절망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배경에 깔고도 저자는 희망을 말한다. “강간은 근절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쳐 다수가 협력해야만 가능하며, 여성만큼이나 남성의 이해와 선한 의지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함께 강간의 미래를 단호히 부인할 차례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책과 길] 강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행돼 왔나
입력 2018-03-09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