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영석] 탄핵열차서 아직도 못 내린 한국당

입력 2018-03-08 17:52

“피청구인의 위법 행위는 국민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지난해 3월 10일 오전 11시21분이다.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읽어내려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문이다. 자유한국당의 상징적 1호 당원은 그렇게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1년 가까이 흘렀다. 박 전 대통령과 권력을 공유했던 한국당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마디로 변한 게 없다. 한국갤럽이 박 전 대통령 탄핵 직후인 그해 3월 14∼16일 여론조사를 한 결과 한국당의 지지율은 12%였다. 1년 뒤 올 3월 첫째 주 조사에선 13%였다. 그 사이 81%까지 오르며 고공비행하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60%대로 내려왔음에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한국당이 수권정당으로서의 국민 신뢰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현실은 더 암울하다. ‘수구’ ‘꼰대’ 이미지 탓에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한국당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이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지지 의사를 표시하는 순간 ‘일베충’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6·13 지방선거가 3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영남권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후보조차 구하기 힘들다.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현재 구도라면 참패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한데 불속으로 뛰어들 바보는 없다. 정치 순리대로라면 4·19혁명 뒤의 자유당처럼 사라졌어야 할 존재였다.

탄핵 전후의 주장도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색깔론에 심취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남북 관계가 변하고, 북·미 대화도 문턱까지 와 있음에도 냉전적 사고는 그대로다. 해법은 제시하지 않은 채 반대를 위한 반대만 외치고 있다. 정국을 주도할 만한 이슈는 만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지방선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개헌마저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386’으로 대변되는 진보 성향을 띤 이들이 50대까지 자리 잡았음에도 아직도 50대가 내 편인 양 착각하고 있다.

당내 상황도 도긴개긴이다. 논쟁도 토론도 없다. 과거 당내 정풍운동의 대명사였던 소장파는 눈뜨고 찾아봐도 없다. 거친 언변을 앞세운 ‘원 톱’ 공격수 홍준표 대표의 독무대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며 사당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개혁 의지는 온데간데없다. 이러니 한국당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국민들이 체감하기 어렵다. 한국당은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종착역도 모른 채 탄핵열차에 앉아 웰빙만 즐기고 있다. 더 망해봐야 정신을 차릴 듯하다.

한국당이 생존하려면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종착역에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자세여야 한다. 올바른 진단과 혁신이 선행돼야 한다.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이 체질 개선의 적기다. 지방 선거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집권을 위한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유권자 성향을 제대로 읽는 게 우선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은 사회 전반에 탈보수화 경향을 불러왔다. 전통적 의미의 보수 고객층이 줄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5060세대에만 기대지 말고, 1020세대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 세대는 진보와 보수의 색깔이 완전히 칠해져 있지 않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실용보수의 관점에서 이들을 위한 정책 개발에 집중 투자해봄직하다.

과감한 인적쇄신은 필수다. 마구잡이식 투사형 공격은 야당 시절엔 적합할지 몰라도 미래의 집권을 담보해 주진 못한다. 다양한 형태의 공격수 영입이 필요하다.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자유로운 이면 좋다. 1020세대를 끌어들일 만한 소통력을 갖춘 뉴 리더여야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과거 DJ·YS의 40대 기수론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지금이 탄핵열차에서 내려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