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올겨울 동물털 둘렀던 많은 ‘현송월’에게… “가짜가 더 멋져요”

입력 2018-03-09 05:05
지난달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에 맞춰 방남한 북한 예술단(왼쪽)과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 사진공동취재단
진짜는 눈총을, 가짜는 환호를 받는 세상이 됐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티파니는 지난달 미국 뉴욕 패션쇼에 여우털 재킷을 입고 참석했다(위). 아래 두 사진은 지난해 4월 서울에서 열린 한 패션쇼에서 남녀 모델이 가짜 털로 제작한 의상을 입고 런웨이를 걷는 장면. 온라인커뮤니티, 비욘드클로젯 제공
부드러운 모피 위해 생후 6개월 동물 대부분 공장서 산 채로 가죽 벗겨
2∼3년 전만 해도 선망의 대상서 생산 과정 알려지면서 거부감 증가
소녀시대 티파니 최근 패션쇼 사진 “모피 재킷 개념 없다” 악플 쏟아져
구찌·VF 그룹 등 ‘탈모피’ 선언… 가짜 털 ‘비건 패션’ 브랜드도 봇물
다양한 대체 재료 등장하면서 모피와 촉감 비슷하고 가격 싸 인기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님,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국민일보 신은정 기자입니다. 지면을 빌려 이 편지를 쓰는 건 내려오실 때 입은 옷 때문입니다. 한반도 정세가 급박한 와중에 한가롭게 무슨 패션 이야기냐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예술단 공연의 사전점검을 위해 1월 21일 서울에 오실 적에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두툼한 모피 목도리를 두르셨더군요. 목덜미를 완전히 덮고 남아 배꼽까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검은색 모피 털모자를 쓴 모습도 방송을 통해 봤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도 비슷한 모자를 쓰고 풍성한 털이 달린 코트를 입었습니다.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만 단장님을 비롯한 북한 손님의 ‘모피 패션’은 참 아쉬웠습니다.

모피 입은 걸그룹, 악플을 받았습니다

2월 11일 삼지연관현악단의 서울 공연 무대에 섰던 서현씨를 기억하시나요. 그와 함께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로 활동하던 티파니란 친구가 있습니다. 티파니가 최근 미국 뉴욕 패션쇼에서 찍힌 사진 한 장으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모피 재킷 때문이었습니다. 협찬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동물 털 의상을 거부할 수는 없었느냐고 쓴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티파니의 모피 재킷을 놓고 200개가 넘는 댓글이 게재됐습니다. “개념 없다”는 ‘악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티파니가 입은 재킷이 진짜 동물 털인지 아닌지를 놓고 왈가왈부했습니다. 명품 브랜드 오프화이트의 2017년 컬렉션 제품이더군요. 업체 사이트에 가보니 그린란드산 여우털 100%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국 분위기가 이렇게 된 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2∼3년 전만 해도 모피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평소 잘 보지 못하는 고가의 모피 재킷을 입은 연예인은 ‘패셔니스타’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으니까요. “모피를 입지 말자”는 동물보호단체의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동물 털을 흉내 낸 ‘페이크 퍼(Fake Fur)’를 입으면 마치 ‘짝퉁’을 입은 것처럼 창피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러나 요즘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단 ‘페이크 퍼’란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동물과 환경을 생각한다는 의미로 ‘에코 퍼(Eco Fur)’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패션계는 이마저도 잘 쓰지 않는다는군요. 가짜와 진짜의 구분 없이 ‘퍼(털)’는 그냥 ‘퍼’입니다.

모피의 잔혹함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모피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모피를 꺼리는 까닭은 그 생산 과정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모피 공장’은 모피를 채취하기 위해 산 채로 동물 가죽을 벗깁니다. 동물이 죽은 다음에 해도 되지 않느냐고요? 몸이 단단하게 굳는 사후경직 때문에 가죽이 뒤틀린답니다. 더 좋은 모피를 얻으려고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가죽을 벗기는 겁니다. 부드러운 털을 위해 생후 6개월 정도의 동물이 주로 희생됩니다. 국내외 동물보호단체는 해마다 4500만∼5000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 농장에서 고통 속에 죽는다고 입을 모읍니다.

패션산업을 이끄는 세계적 기업도 탈모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지난해 10월 동물 모피 사용 전면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모피 제품의 종말을 알렸습니다. 반스와 팀버랜드 등 세계적 의류 브랜드를 소유한 VF그룹도 모피나 앙고라를 쓰지 않겠다면서 ‘퍼 프리’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스텔라 매카트니, 아르마니, 랄프 로렌, 휴고 보스 등은 이미 모피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온라인 유통회사인 육스 네타포르테 그룹은 지난해 6월 모피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고객 2만5000명에게 물었더니 절반 이상이 “모피 판매 중단을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신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더 윤리적으로 소비한다”는 컨설팅 회사의 진단도 있었습니다. “동물 털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다”라면서 가짜 털을 이용해 모피처럼 만드는 ‘비건 패션’ 브랜드도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패션에서도 채식을 추구하자는 겁니다. 후원을 유도하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비건 패션 제작 계획이 올라오면 목표보다 더 많은 후원금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따뜻하지도 않고 멋도 없는 걸 동물을 보호하자는 의미만으로 소비자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옷을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에코 퍼에 관심을 두고, 기업이 과감하게 동물 털을 포기한 건 모피를 대신할 다양한 대체 재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온 가짜 털을 만져보셨는지요. 진짜와 정말 비슷합니다.

1월 아주 추웠던 날,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입고 온 털 재킷을 손으로 만져봤다가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감촉으로 재질을 잘 맞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촉감은 분명 토끼털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성섬유인 아크릴로 만든 가짜라고 했습니다. 진짜와 거의 같고, 훨씬 더 싼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밍크·여우·코요테 등 패션 기업에서 주로 사용하는 모피는 굉장히 비슷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짜가 이렇게 진짜 같은데…

올겨울 인기를 끌었던 롱패딩 점퍼도 들여다보면 모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리·거위 털 충전재는 끔찍한 방법으로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후 2∼3개월이 지난 거위는 산 채로 털을 뜯기고 다시 털을 기르기 위해 우리에 갇힙니다. 살이 찢겨 피를 뚝뚝 흘리면서요. 다시 6주가 지나면 보송보송하게 올라온 털을 사람에게 뜯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패딩 점퍼를 만드는 많은 아웃도어 브랜드가 덜 잔혹한 방법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는 친환경 인증 단체와 함께 동물 학대 여부를 심사하는 프로그램을 각각 만들어 지키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물의 털을 뽑지 말자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당연한 것마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게 패션업계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이 입은 ‘팀 코리아’ 패딩 점퍼도 노스페이스가 이렇게 인증한 거위털로 만든 것입니다.

폴리에스터 등으로 개발한 패딩 점퍼 충전재는 가볍고 쌉니다. 거위털에 비해 보온성이 밀리지 않거나 오히려 높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란 인식 탓에 추운 겨울 소비자의 선택을 많이 받지 못합니다. 동물과 환경 보호를 위해 신소재 충전재를 사용한 패딩 점퍼인데 모자엔 코요테나 너구리 털이 달리는 역설적인 일도 종종 벌어진다네요.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TV 속 유명인이 입은 모피 재킷에 손가락질하면서 정작 내가 옷을 살 땐 “나 하나쯤 괜찮겠지”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패션에서 모피를 배척하는 건 이상향을 꿈꾸는 일 같기도 합니다. 한 가지 고백하건대 제 옷장에도 밍크 털이 장식된 코트 한 벌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는 제게 쓰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이 편지는 작은 바람에서 시작됐습니다. 다시 찾아올 겨울, 새롭게 옷을 장만할 때 이 편지를 잠시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서 현 단장님을 다시 볼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모피를 입지 않으시길 고대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이 땅의 수많은 ‘현송월’에게 이 편지를 띄웁니다. 불편한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