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그의 칼럼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린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이자 신경학자였던 올리버 색스(1933∼2015)의 글이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생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암으로 투병하던 색스는 이 글을 발표하고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유서와도 같은 저 칼럼을 내놓은 뒤에도 꾸준히 무언가를 읽고 쓰면서 최후의 작품을 준비했다. 그 작품이 바로 색스의 유작이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선물인 ‘의식의 강’이다.
색스의 연인이었던 작가 빌 헤이스는 이 책이 ‘탄생’하던 시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2015년 8월, 어쩌면 그는 곧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의식의 강’은 최근에서야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책에는 모두 10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색스 특유의 박람강기(博覽强記)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의식의 본질이나 시간의 의미를 묻는 묵직한 내용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이 그렇듯 결코 어렵거나 따분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상당한 재미와 뭉근한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부분들을 소상하게 살핀 내용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기억의 가변성’을 다룬 에세이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이 대표적이다.
색스는 저서 ‘엉클 텅스텐’에 청소년기에 경험한 이야기를 실었다. 나치 독일이 1940년 영국 런던을 공습했을 때 집 뒤뜰에 소이탄이 떨어져 난리가 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뒤 그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 기억은 잘못된 거야. 넌 그때 그곳에 없었어.”
형의 설명에 따르면 색스는 당시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형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내용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시간이 흐른 뒤 편지 속 이야기를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색스는 기억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지 들려주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위적인 기억들이 타인에 의해 암시되거나 은연중에 주입되는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찰스 다윈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처럼 위대한 학자들의 학문 세계가 어땠는지 개괄한 내용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책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에세이는 다윈과 관련된 글이다. “다윈을 통해 나의 생물학적 독특성, 생물학적 내력, 다른 생명 형태와의 생물학적 혈연관계를 알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 지식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자연을 내 고향처럼 느끼게 해주고, 나 자신만의 고유한 생물학적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색스는 수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창의력은 어떻게 발현되는지 들려준다. 표제작 ‘의식의 강’에서는 ‘생각’의 탄생을 다룬다. 생각이라는 건 흘러가는 거대한 강물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프레임이 모여 영상이 되는 영화처럼 ‘순간의 집합체’인지 자문한 내용이다.
그의 전작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나 ‘화성의 인류학자’를 읽은 독자라면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색스와 같은 의사를 만나고 싶다’ ‘저런 사람이 나의 멘토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만큼 그가 남긴 글은 아름다웠고 대단했으며 기발했다.
책에는 그가 얼마나 글쓰기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의 팬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때때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저절로 체계가 잡히고, 즉석에서 적절한 단어들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나의 성격과 신경증을 상당 부분 우회하거나 초월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 상태의 나는 내가 아닌 동시에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며 최상의 부분임에 틀림없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책과 길] 우리가 사랑한 의학계 시인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선물’
입력 2018-03-09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