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고졸한 기운까지 품은 사진

입력 2018-03-08 05:03
이정진 ‘미국의 사막 I 91-23’(1991).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지에 붓질의 흔적이 있다. 사막의 풍경이라는데 잡목 한 그루, 바위 두어 개를 꽉 차게 배치했다. 동양화에서 즐겨 그리는 소재다. 고졸한 기운까지 감돌아 언뜻 수묵화 같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사진이다. 한지에 인화한 사진작품인 것이다.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 사진작가 이정진(57)의 개인전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8일 개막했다. 사전 언론 공개 행사에서 만난 작품들은 사진과 회화간 경계 허물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화지 대신 한지에 붓질로 감광액을 손수 발라서 현상한 덕분에 이런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작가는 공예를 전공했지만 사진에 매력을 느껴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던 그는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정형화된 사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작가는 인화용지를 종이 키친타월 잡지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하다 1990년대 사막 연작을 찍기 시작하면서 한지에 주목했다. 동양화 붓으로 그린 듯한 허름한 가옥이나 사막의 모습뿐 아니라 뭘 찍었는지도 모르는 수묵 추상화 같은 작품도 있다. 영화 스틸 컷을 연상시킨 듯 배경에 검은색 테두리를 두른 것도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 이미지를 보는 나의 느낌, 풍경 안에 감정이 이입된 상태”라고 말했다.

카메라의 출현 이후 회화는 추상의 길을 걸었지만 또 다른 극단에서는 사진인양 극사실주의로 치닫기도 했다. 사진 역시 ‘회화인 척’하기도 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동양화인 척’하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진 전문기관인 스위스 빈터투어 사진미술관과 공동으로 추진됐다. 2016∼17년 스위스와 독일 미술관을 순회한 후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세계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오는 7월 1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