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리얼리즘, 동양화에 녹여냈다

입력 2018-03-08 05:01
김학량(오른쪽) 정재호 두 동양화 작가가 지난 2일 2인전 ‘자화상’이 열리고 있는 신생 공간 ‘산수문화’에서 포즈를 취했다. 산수문화는 아시아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동양화과 출신의 작가 김지평씨가 2016년 문을 열었다. 곽경근 선임기자

동양화는 21세기에도 유효한가.

미술시장에서 수십 년째 한국화 인기가 시들한 지금, 그런 질문에 집요하게 답하듯 작업하는 작가들이 있다. 한지에 시대를 담는 김학량(54)·정재호(47) 작가가 그들이다. ‘동양화 형제’가 다시 뭉쳤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신생 갤러리 ‘산수문화’에서 11년 만에 2인전 ‘자화상’전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난 2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얼굴 작품이 걸려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김 작가는 한지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인 잠수함이나 내부의 통신장비, 압력계 등을 드로잉처럼 그려 내놓았다. 정 작가는 황량한 신도시 주변의 풍경을 담아냈다.

서울대 동양화과 선후배 사이인 둘은 사대부 문인 중심으로 발전해온 지필묵 그림의 전통을 색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데서 닮았다. 행보는 좀 달랐다.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인 김 작가는 학부에서는 동양화, 대학원에서는 미술사를 전공했고 이후 큐레이터로, 평론가로 활동했다. 1998년 첫 개인전 ‘문사적 취향-난’을 열며 작가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재개발 현장의 철근 잡초 등을 난초 이미지처럼 포착한 사진 작품을 내놔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문인화의 거두 추사 김정희의 ‘부작란도’의 관념성을 비꼰 것이다.

“근대화를 겪으며 서구의 추상 개념을 받아들여 수묵 추상을 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추상을 하려면 사실 세계를 충분히 탐구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리얼리스트로의 동양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투는 조곤조곤한데, 설득력이 있다.

왜 소재가 잠수함일까. 2007년 두 사람이 참여했던 2인전 ‘채널’전과 연결돼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고향 강릉에 설 명절을 쇠러 갔다가 정동진의 통일안보공원에 들렀던 일화를 꺼냈다. 그곳엔 남한의 구축함과 북한의 잠수함이 전시돼 있다. 그는 “선박 내부를 보며 기계가 주는 아름다움에 우선 홀딱 반했다”고 했다. 2007년 전시는 구축함을, 이번에는 잠수함을 연작처럼 그린 거다. 분단 등 이념적 언어를 일절 얘기하지 않았지만 바다 위로 검은 등을 드러낸 북 잠수함이 묘한 불안감을 풍긴다. 이런 느낌은 한지로 표현해내기가 힘들다. 흑연가루를 물에 개 써서 그런 효과를 배가한다. 한지뿐 아니라 노랑 초록 빨강이 밸브에 색칠된 기계를 꽃처럼 포착해 ‘꽃상여’라고 이름 붙인 사진작품도 내놨다. 그는 “예술가는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매체를 달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11년 전 비행기와 각종 미제 러시아제 전투기를 그려내 문명의 이중성을 드러냈던 정 작가가 이번에 선택한 소재는 동네 풍경이다. 14년째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일산 외곽 성석동 주변을 그렸다. 농가가 헐릴 때마다 물류창고가 들어서는 동네다.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나면 죽은 듯이 비워지는 동네, 드문드문 남은 민가의 개 짖는 소리가 황량하게 들리는 동네다. 수년 전 어머니를 인근 요양원에 모신 후엔 새로운 느낌이 포개졌다.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입혀진 것이다. 관처럼 다가오는 물류 창고, 그 마당의 함부로 자란 잡초, 공장은 헐렸는데 생뚱맞게 남은 굴뚝, 주인 잃은 개가 여기저기 싸놓은 개똥…. 먹이 아니라 목탄가루가 풀어낸 한지의 정조가 한없이 쓸쓸하다.

“동양화를 현대적 미감으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찾은 것이 목탄가루를 물에 푼 겁니다. 먹은 그리는 순간 종이에 깊이 스며들어 지울 방법이 없습니다. 목탄은 그 위에 물이 닿으면 번지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지요. 그런 유동성이 죽음을 표현하는데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 작가는 “제가 사는 동네이기도 하고, 제 모습이기도 하고, 제 심정이기도 하다. 한데 도심 외곽으로 나가면 다 이런 풍경 아니냐”고 했다. 우리 사회의 얼굴을 그렸다는 얘기다.

동양화를 왜 지속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되묻는다. “그럼 서양화는 왜지요? 잘 팔리는 것 외 다른 이유가 있나요. 재료가 주는 회화의 맛은 분명히 달라요. 가벼우면서도 그윽한 맛은 캔버스나 아크릴은 만들 수 없지요.”

세종대 교수이기도 한 정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8’의 최종 4인 후보에 올랐다. 전시는 20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