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읽기] 러시아는 왜 ‘차르 푸틴’의 편인가
입력 2018-03-07 05:05 수정 2018-04-03 14:11
철권통치에 경제불황 겹쳤는데 지지율 78% 안팎… 6년 재집권 확실
구소련 몰락 수습한 구원자에 강한 反서방 지도자로 자리매김
원죄 있는 공산당 빼면 야권 무력 “EU 동진에 대한 반작용” 해석도
러시아 대선(18일)이 바짝 다가왔다. 그러나 전 세계 누구도 선거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고 있다.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65) 대통령의 재선이 워낙 확실시돼서다. 러시아 대중은 서방 제재에 따른 경제난과 현 정권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푸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서방에서는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인 80%를 넘나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겪은 역사와 정치구도, 서방의 실책 등이 이러한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분석했다.
“옐친(보리스 옐친 초대 대통령)이 모든 걸 잘못했지만 잘한 게 딱 하나 있다. 푸틴을 뽑은 것이다.” 러시아 대중 사이에서 푸틴의 인기는 이 농담 하나로 요약된다. 현지 여론재단(FОМ)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으로 푸틴의 지지율은 78%로 여전히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다. 푸틴의 지지율은 총리로 취임한 2개월 뒤인 1999년 10월 이후부터 60% 아래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푸틴의 인기는 일견 의아한 면이 있다. 최근 수년 사이 러시아 경기가 워낙 부진했던 까닭이다. 러시아는 푸틴이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제재를 주도하면서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때를 맞춰 주요 수출 품목인 원유 가격까지 폭락하면서 개인의 소비여력을 뜻하는 실질가처분소득은 4년 연속 내리막길만 걷고 있다.
지난 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마네쥐나야 중앙전시관. 러시아 국기가 연단 양 끝 대형스크린 가득 펼쳐진 가운데 푸틴은 대국민 연례 연설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지난 15년간 군비 경쟁을 부추기고 러시아를 갈취한 자들과 러시아의 발전을 막으려 제재를 시행한 자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이 막으려 한 일들은 이미 벌어졌다. 당신들은 러시아를 막을 수 없다!”
푸틴의 이 같은 반(反)서방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메시지는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에 철저하게 호응한다. 미국과 대등하게 겨뤘던 소련의 기억,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맞서 유럽을 ‘구원’했던 경험, 로마제국의 계승자로서의 자부심 등이 소환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4년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푸틴의 지지율이 20% 포인트 가까이 치솟은 점, 최근 미국 등 서방에 맞서 독재정권인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는데도 인기가 변함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화 이후의 경험 역시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을 신뢰하는 이유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 붕괴 뒤 옐친 전 대통령 아래에서 끔찍한 경제난을 겪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올리가르히(재벌)가 결탁해 부패와 폭정을 저지른 탓이었다. 흔들리던 러시아 사회는 2000년대 푸틴이 집권하고 나서야 안정을 찾았다. 국민 중 30대 이상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이 탓에 러시아 국민들은 아직까지 공적 영역을 불신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정당에 대한 신뢰도는 12∼18%, 사법제도는 22∼26%, 경찰은 28∼35%로 매우 낮았다. 반면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답은 67∼78%에 이르렀다.
현재 러시아에서 푸틴을 대신할 정치세력은 없다시피 하다. 야권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은 러시아공산당(KPRF)이지만 이들은 과거 구소련의 기억 때문에 집권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서방의 주목을 받는 알렉세이 나발니 등 자유주의 성향의 지도자는 지지자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 세력화가 어렵다.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는 “푸틴 스스로도 유리한 정치적 포지션을 선점했다”면서 “극우 세력과 구별되면서도 올리가르히와 결탁하지 않는 애국주의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영리하게 가져갔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푸틴이 탄생하는 데 서방의 실책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유럽을 경제·군사적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EU에 끌어들이면서 러시아의 반발을 자초했고 이에 등장한 게 푸틴이라는 설명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지금의 푸틴을 만든 건 결국 EU”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 같은 체제가 오래 지속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푸틴 개인의 카리스마에 기댄 면이 워낙 커 금방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틴 스스로도 내각을 젊은 관료들로 세대교체하는 등 추가 임기 6년이 끝난 뒤의 러시아를 준비하고 있다. 제 교수는 “지금의 러시아는 집단지도체제인 중국보다 더 불안정한 체제”라면서 “푸틴은 이번 임기 중 차기 체제 구상에 몰두하고 임기 뒤 물러나 과거 중국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처럼 새 통치자의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