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성추행 의혹 전면 부인한 고은의 석연찮은 처신

입력 2018-03-05 17:33
고은 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성추문을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출간해 온 영국의 한 출판사를 통해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정하고 글쓰기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지난 2일자(현지시간) 기사에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고은은 “일부에서 제기한 상습적인 성추행 의혹을 단호히 부인한다”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한 사람으로서, 시인으로서 명예를 지키며 집필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은의 이 같은 처신에 대해 비난 여론이 많다. 피해자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가해자의 2차 성폭력이란 것이다. 그를 둘러싼 성폭력 의혹이 한두 건 불거진 게 아닌 마당에 대놓고 공박하는 것은 국민의 존경을 받던 원로시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도 국내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는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외국 언론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나섰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 최영미 시인이 밝힌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원론적이고 두루뭉술한 대응이란 측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최씨는 4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가 괴물에 대해 매체를 통해 한 말과 글은 사실”이라며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식 기구가 출범하면 나가서 상세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고은의 성폭력 논란은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과 함께 ‘미투’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가해자와 폭로자 모두 한국 문학계의 유명인이어서 파장은 확산됐다. 이제 진실은 문단의 공개적인 기구를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안타깝다. 문학의 원천인 ‘공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명되던 한 거목의 말년이 이 정도로까지 망가졌다는 현실이 너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