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한승주] #미투, 우리 이것부터 하자

입력 2018-03-05 17:32

이 정도면 한 개인의 문제도, 특정 집단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사회 중년 남성들, 특히 집단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잘못된 여성 인식이 문제다. 본질적으로 약자에 대한 일상화된 차별과 억압의 문제다. 관행적으로 혹은 격려하기 위해서라며, 죄의식 없이 행해온 그들의 말과 행동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이제는 알고 있을까. 이번 폭로로 실명이 공개된 이들뿐 아니라, 덜 유명해서 혹은 일반인이어서 드러나지 않은 이들도 말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나온 지 한 달여. 법조계에서 시작된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 운동(#MeToo·나도 당했다)’은 들불처럼 번져 우리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묵혀왔던, 당사자로선 인생을 건 용기 있는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위를 이용한 ‘권력형 성폭력’은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나오고 있다. 권력을 지닌 자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조직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속수무책 당하고 살았다. 안마가 성기 마사지로 이어지고 임신과 낙태까지 가는 동안에도 이것을 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였다.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어렵게 용기를 낸 이들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나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버텨오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본다. 남자가 대다수인 조직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힘겨운 일이다. 이번에 폭로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살아오면서 겪었을 크고 작은 성희롱, 그리고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만연한 성차별. 웬만한 건 꾹꾹 눌러 참았으리라. 폭로했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정말 이건 말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 싶은 것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렵게 세상에 꺼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이 안 난다, 동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가해자를 보면서 TV에 얼굴과 목소리를 내보인 것이다. 나 여기 정말 실존하는 인물이랍니다, 제발 인정하고 사과하세요라고.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헛되지 않게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성폭력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는 신상이 알려져 2차 피해를 당하고, 정작 가해자는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목도했다. 소나기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엔 어물쩍 넘어가선 안 된다.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낼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 공익적 목적에 의한 폭로는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또 사실을 말하더라도 명예훼손인 현행법을 미투에 한해서는 예외로 하는 개정이 필요하다. 권력형 성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늘리는 방안도 고려돼야 한다.

용기의 언어가 된 미투는 좀 더 폭발적으로 진행돼서 한국 사회를 확 바꾸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미국 할리우드 미투처럼 문화예술계의 거물급 인사가 폭로를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미투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것이다. 미투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다. 미투 이후 성폭력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성숙해졌다. 우리는 변해가고 있다. 아, 이런 것도 성추행이구나 하는 인식, 세상에 말하면 이제는 바뀐다는 의식, 무엇보다 내 몸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깨달음. 정말 어렵게 온 이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선 안 된다.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한다. 미투를 선언한 한 여성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피해자를 스스로 숨게 만들어 가해자들이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은 이제 끝나야 한다.” 우리 이것부터 하자.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