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반도체 등 수입규제 예고… 섣부른 맞대응 역풍 가능성
규정 모호한 ‘안보’ 내세워 美는 WTO와 전면전 별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도발로 전 세계에 무역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유럽과 중국 등은 ‘보복관세’로 맞불을 놨지만 주요 피해자인 한국은 뾰족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전투력이 약한 데다 자동차와 반도체까지 미국이 줄줄이 수입 규제를 예고한 상태라 섣불리 맞대응에 나섰다가는 피해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이 침묵하는 이유
미국 정부가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 폭탄' 조치를 공식화한 뒤 유럽연합(EU) 회원국과 중국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등은 미국을 상대로 강경 대응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철강·알루미늄의 관세 폭탄은 물론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압박,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등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통상 정책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한국은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2일 미국 정부의 최종 발표가 나올 때까지 대미(對美) 아웃리치(외부 접촉을 통한 설득작업)에 매진하겠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다.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미국의 무역보복 조치들이 FTA 규정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다. 미국이 FTA 자체를 폐기하겠다고 나올 경우 상황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트럼프발 무역 전쟁이 전 세계를 겨냥한 만큼 굳이 한국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강한 유럽이나 중국 캐나다 등이 미국과 전면전에 나서는 만큼 한국은 추이를 지켜보면서 대응 수위를 조절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다. 강성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조치에 대해 “(국가안보는 WTO 무역규범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21조에 적용받느냐가 핵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세탁기, 태양광을 대상으로 한 세이프가드에 대해서도 WTO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진짜 상대는 WTO
통상 전문가들은 미국의 무역전쟁의 진짜 상대는 WTO라고 얘기한다. 그 근거로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 보호무역파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통상위원회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을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승진시키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점이 꼽힌다. 나바로 국장은 미국 경제학자 중 유일하게 트럼프 정권에 합류한 교수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5만7000개의 미국 공장이 사라졌고, 2500만명의 미국인이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며 WTO를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후보 시절 그가 내놓은 경제 계획 보고서에도 이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에 고관세를 부과하겠다며 굳이 자충수가 될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든 것도 WTO와의 싸움을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국가안보가 위협받을 때까지 정부가 손 놓고 있었음을 자인한 꼴이 되는데도 무역확장법 232조 카드를 꺼내든 데는 ‘안보’라는 키워드의 모호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2년 당시 철강제품에 대해 미국이 세이프가드를 취했을 때 한국 등 관련국가들은 WTO에 제소했고 미국이 패소했다. 하지만 무역확장법 232조로 관세를 부과할 경우엔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WTO는 상위 규정인 GATT를 따르고 있다. GATT 21조는 국가안보가 WTO 무역규범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규정에 맞느냐를 따지는 조항이고 19조는 자국 내 수입이 급격히 증가하고 국내 산업에 심각한 피해가 있는지가 핵심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관계자는 “세이프가드를 취하려면 수입 급증, 산업 피해, 인과관계를 언급할 때 ‘예측하지 못한 사태의 발전’이라는 상황이 전제돼야 한다”면서 “이를 명백히 확인한다면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19조의 경우 안보에 대한 규정이 모호해 제소한 국가들에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 공조해야 WTO 제소 승산
한국 정부가 할 일은 유럽이나 중국 등과 공조하는 것이다. 2002년 철강에 대한 세이프가드 때도 한국은 일본, 유럽 등과 공조한 덕에 승소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4일 “WTO 제소라는 국제 규범을 통해 미국의 통상 압박에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WTO에 제소해도 유럽이나 중국 등 강대국들과 공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트럼프 무역전쟁에 보복관세?… ‘전투력’ 약한 韓은 무리수
입력 2018-03-05 05:05 수정 2018-03-05 1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