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은 몇 달 새 환자안전이 모래성 위에 쌓여있음을 목격했다. 이국종 교수의 귀순병사 치료과정이나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사망사건으로 열악한 중증외상센터와 신생아중환자실 환경문제가 드러났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사고로 중환자실 환자 결박문제가 재조명되는가 하면, 의원부터 상급종합병원에 이르기까지 환자안전이 위협받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최소한이나마 환자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살펴봤다.
◎중환(重患)에 신음하는 중환자실
美 3분의1 인력 운용… 숙련 간호사 절반 안돼
국내 중환자의료는 어디쯤 와 있을까. 대한중환자의학회 임채만 회장(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은 “한계에 다다랐다”며 “당장 소생술이 필요한 혼수상태”라고 답했다. 의료현장의 묘안을 듣고자 만난 자리에서는 연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잇따른 환자안전사고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닌,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는 답답함의 표현이다.
중환자실의 업무 강도는 의료기관 내에서도 높은 수준에 속한다. 중한 환자들이 밀려오는데 비해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임 회장은 “우리나라 중환자실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 3분의 1의 인력이 같은 수준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그마저도 업무 강도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치료 기술과 기기의 발전, 그리고 의료 질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업무량이 과거에 비해 확연히 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와 의료계는 ‘의료 질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각종 인증과 규제, 그리고 관련 지침이 매년 업데이트돼왔다. 그런데 왜 환자안전을 담보하지 못할까. 임 회장은 다시 ‘인력’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작년 발표된 중환자실 적정성 평가에 따르면 중환자실 전담전문의 한 명이 맡는 병상 수는 평균 45병상, 간호사 한 명이 맡는 중환자는 평균 6명이었다. 전담전문의 의무 조항이 없는 종합병원 급으로 가면 전체의 80%에 전담전문의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급종합병원의 일반중환자실 기준 전담전문의 1명당 중환자 10∼15명, 간호사 1명당 중환자 1∼2명을 적정인력 수준으로 제시했다.
중환자실 의료진의 숙련도도 부족한 실정이다. 임 회장은 “중환자실은 여러 가지 고난도 치료가 행해지는 곳인데 불행하게도 중환자실은 의사들에게 인기가 없고, 간호사들 이직률이 높다”며 “실제로 숙련 간호사가 50%가 안 된다. 경력 3년 미만의 미숙한 간호사들과 전공의들이 중환자실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환자안전사고가 인력과 시스템 문제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진의 실수나 부주의로 인한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임 회장은 “개별사건에 대한 평가와 전체 중환자실 문제를 달리 봐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근면 성실하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어느 분야든 다들 초인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며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하는 곳이 의료다. 중환자실의료비가 미국의 10분의 1이지만 의료사고는 비용에 비해 훨씬 적다. 적은 비용과 적은 인력을 가지고 이만한 성적을 내고 있음을 감안해 달라”고 호소했다.
중환자실은 당장 죽을 것 같은 환자가 살아나는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임 회장은 환자의 생사가 직접적으로 나뉘는 이 곳의 매력에 끌려 중환자의학에 매진하게 됐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매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단다. 그는 “10년 전만해도 분발해서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했을 텐데 이제 그런 말은 위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어 “중환자실 의료진들이 사기를 잃은 지 오래다. 의료현장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양질의 의료는 불가능하다”고 힘줘 말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사고
“환자안전법 개정해 의료기관 책임 묻자”
보건복지부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도자 의원(바른미래당 비례대표)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의료기관 등에서 발생한 환자안전사고는 환자안전법이 시행된 2016년 7월 29일부터 2017년 말까지 총 4427건이다. 하루에 9건이 발생한 꼴이다.
유형별로는 침대 등에서 떨어지는 낙상이 2117건(47.8%)으로 가장 많았고, 뒤를 이어 약물오류가 1282건(29%), 검사 290건(6.6%), 진료재료 84건(1.9%), 처치 및 시술 64건(1.4%), 수술 48건(1.1%), 환자 자살 및 자해 43건(1%), 감염 21건(0.5%) 등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는 의료기관의 ‘자율’에 의한, 환자안전보고 학습시스템을 통해 의료기관평가인증원으로 보고된 수치다. 따라서 실제 발생하는 환자안전사고는 이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국회와 전문가들은 환자안전법 개정을 포함해 환자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항들을 정해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일부에서는 의무조항과 처벌규정을 둬 환자안전을 확보할 최소한의 환경을 구축해야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도 의료기관 인증 및 의료 질 평가 중 환자안전영역을 강화하고, 사망사건 등 인명피해가 발생한 적신호 사고에 대한 보고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대책이라며 내놨다.
이와 관련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남인순 의원(더불어민주당·송파구병)은 지난달 27일 중대한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신고의무화를 담은 ‘환자안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원 11명이 공동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환자안전법 일부개정법률안’에는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환자에게 영구적인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입힌 사고, 일정 기간 이상의 의식불명 등을 중대한 환자안전사고’로 정의됐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의 의료기관에서 의료법 제24조의2에 따른 설명·동의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중대한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한 경우 해당 의료기관의 장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며 ‘중대한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한 경우 그 신고를 게을리 한 의료기관의 장 또는 그 신고를 방해한 자에 대해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남인순 의원은 “현행 환자안전법 제14조는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한 경우 보건의료인 등에 의한 자율신고만을 규정하고 있다. 또 현행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1조는 감염병에 관하여만 의사 등에게 신고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며 “감염병이 원인이 아닌 중대한 환자안전사고에 대해서는 정보 전파와 그에 따른 대응이 지체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대목동병원의 동시다발적인 신생아 사망 사건과 관련 보건당국 차원의 대응이 지체된 근본적 원인 또한 신고의무 부재에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환자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의료기관이 이행해야한다는 점에서 동의하면서도 의무를 부여하거나 처벌을 동반한 강제조치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고를 감추거나 위험이 따르는 진료를 꺼려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대학병원들이 JCI 인증을 홍보나 과시를 위해 받는 것이 아니다. 앞선 진료환경을 도입하고, 국내 요구수준 이상의 환자안전을 확보하고 있다는 노력의 결과이자 자기평가”라며 “사고는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고”라고 말했다. 이어 “개선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료기관 스스로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려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의료기관과 의료진을 처벌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당장 인력이나 시설, 장비가 부족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조치가 수두룩하다”고 답답함을 표하기도 했다.
◎환자 안전사고 해법은 ‘투자’
“재발 사고 막도록 의료시스템 정비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환자안전이 담보될 수 있는 빈틈없는 지침과 규정을 만들고, 임상현장의 일선에서 의료진과 의료기관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함께 죽지 않게 지킬 수 있도록 인식을 강화하는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조윤미 C&I소비자연구소 대표는 환자안전사고의 핵심을 “의료진의 인식과 몸가짐 같은 기본”이라고 설명하며 “아무리 선진적인 의료시스템을 갖춰도 환자안전사고는 결국 사람의 실수와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실수를 줄이고 환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조 대표는 “이와 같은 기본에 충실한 의료서비스를 실현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국내 의료체계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강제하고 의무와 책임만을 강조하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어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 대표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안 대표는 “단순히 매뉴얼로 할 수 있는, 소위 ‘원칙을 지켜라’라고 해서 바뀔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시설이나 장비, 인력기준 개선 등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남는다”고 말했다. 또 그는 “환자를 살리는 치료와 환자를 죽지 않게 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아직 국내 정책이나 관계자들의 관심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항암제 급여에 1조원을 쓰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환자안전에 1조원을 들이는 데는 인색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목소리는 의료계 내부에서도 나온다. 한원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장은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문제는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입장에서 비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고 2차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환자안전문화를 조성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와 논의가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정남식 대한민국의학한림원장은 “전공의나 주치의, 간호사를 구속시키고 의료기관에 제재를 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환자안전문제를 바라보는 정부와 사람들의 인식에 일침을 가하며 “근본적으로 시스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환자안전을 담보할 체계나 기준이 지켜지게끔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병원을 지원하며 의료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기본충실 의료·철저한 검증이 해법
병원 구성원간 사고정보 공유 이뤄져야
전문가들은 제도적 변화와 함께 기본에 충실한 의료서비스를 강조하며 실수를 줄이고 환자안전사고에 대해 인식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아울러 기본이 되는 환자안전사고 관련 정보의 시발점인 의료기관의 보고가 정확히 그리고 세세하게 이뤄져야하며, 투명하게 공개·공유돼 예방을 위한 단초이자 지식으로 활용돼야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환자안전을 직접 관리하고 대처하는 동일병원 내 근로자들만이라도 사고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사고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경각심을 갖고 대처방안을 고민해 나누는 문화가 만들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실제 서울에 위치한 한 대형병원은 의료분쟁으로 인한 보상비용 등 경영적 손실과 대외적 인지도 및 위상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예방’에 주목했다. 평소 안전사고에 대한 교육을 하고, 관련 서식지를 개발했다. 보직자들이 직접 병원을 순회하는 환자안전 라운딩도 도입했다. 위급상황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보일 경우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연락체계를 갖추고, 주치의 등이 대처에 나서기 전 응급조치와 생명유지를 위한 전담의사와 CPR(심폐소생술)이 가능한 간호사들로 구성된 조기대응팀도 운용했다. 내부 직원들의 환자안전문화 향상을 위해 평소의 팀워크, 안전에 대한 인식, 직무만족도, 스트레스 인지도, 관리직 안전에 대한 직원인식, 근무환경 등에 대한 설문도 진행해 공유했다. 심지어 의료진은 물론 내부 직원들과의 크고 작은 회담에서 안전사고 발생에 대한 내용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자리도 가졌다. 그 결과, 1달에 130명가량 사망환자가 발생했던 상황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정부도 지속적인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1월23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회의에서 각종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삶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5대 국민건강확보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안심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한 세부계획에는 ‘국가 환자안전관리 강화’에 관한 계획도 포함, 국가차원의 환자안전 인프라 구축 및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위한 1차 환자안전종합계획을 수립·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의료기관정책과 관계자는 “현재 의료기관의 자율보고에 의존하고 있는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정보도 사망 등 ‘적신호사건’으로 불리는 중대사건이 발생할 경우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보고의무 위반이나 안전사고 발생에 따른 처벌관련 규정 신설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체계는 보다 많은 보고를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련 정보를 통해 안전경보를 내려 전국단위의 주의조치가 이뤄지고 병원내 인식이나 문화가 개선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준엽·전미옥 쿠키뉴스 기자 oz@kukinews.com
사고나면 땜질처방만… 또 다른 적과 싸우는 환자들
입력 2018-03-04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