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우리의원에서 만난 안일남(65·영락농인교회 장로) 원장은 능숙한 수어(手語)로 인사하며 환하게 웃었다. 안 원장은 대학생 때부터 ‘농인’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중앙대 의대에 입학한 1972년부터 서울 영락교회 농아부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이후 농아부가 ‘영락농인교회’로 독립한 뒤에도 줄곧 농인들과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장로가 됐는데 농인교회 교인들이 ‘청인’을 장로로 선출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농인들의 공동체에 ‘다른 사람’이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 원장의 진심은 통했다. 친구로 인정해 준 것이다.
농인의 친구로 살게 된 이유를 묻자 안 원장은 기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오른쪽 머리에 꾹 눌렀다. 머리뼈가 없었다. 초등 5학년 때 그는 심한 두통으로 인천의 한 소아과에 갔다. 검진 결과는 뇌종양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뇌수술을 하는 건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수술로 야구공만한 종양을 제거했지만 그는 보란 듯이 회복했다. 그에겐 좌절도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테니스를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까지 경기도 대표로 활동했다. 본격적인 공부는 고2 때부터 했고 의대에도 진학했다. 자신이 큰 병을 앓았기 때문일까. 안 원장은 평소에도 장애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 가보니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는 의사들을 찾기 어렵더군요. 농인들은 장애인 중에서도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장애가 없어 보인다는 게 이유였죠. 그래서 농인들과 함께 지내는 의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곁에서 본 농인들의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한 번도 ‘한국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 이들이 글씨를 읽는 건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만큼 힘들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수어를 통해 움직이는 언어를 보는 농인들의 소통 방법을 이해하는 청인들이 많지 않다보니 그들을 위한 학습법도 없었다.
“농인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고작 2% 수준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를 전해도 수어로 통역하는 분이 그만큼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렵죠. 결국 복음을 접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겁니다.” 안 원장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요즘 그는 ‘농인 도서관’ 건립을 위해 뛰고 있다. “농인 도서관은 청인이 농인을 이해하고 농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 겁니다. 이 일에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결국 한 영혼도 구하라던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키는 길이죠.”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사진=신현가 인턴기자
“어려서 큰 병 앓아 장애인에 관심… 농인들과 일생을 친구로 지내요”
입력 2018-03-05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