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기독교 항일운동을 찾아서] 민족 운동사 고비마다 한민족과 고통 나눴다

입력 2018-03-02 00:01
윤산온(조지 섀넌 매큔) 선교사의 모습.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제공
평안북도 선천 신성학교에서 열린 성경학교에 참석한 청장년들의 모습. 맨 뒷줄 왼쪽에 있는 외국인이 젊은 시절 윤 선교사로 추정된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제공
일제 강요로 당시 주민들이 일왕에게 요배하는 모습.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제공
조지 섀넌 매큔(한국명 윤산온·1873∼1941) 선교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시위 참가자들을 숨겨주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미국 의회에 알리는 등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3·1운동, 1935년 신사참배 거부 등 민족 운동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28일 곽신환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장의 도움을 받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윤 선교사의 3·1운동 활약상을 짚어봤다.

한국 독립을 염원한 외국인 선교사

1919년 앞뒤 기록을 살펴보면 윤 선교사가 한국 민족운동가들에게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한 정황이 나타난다.

윤 선교사는 당시 평안북도 선천 신성학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일본 헌병대가 조선총독부로 올린 보고에는 윤 선교사가 1918년 10월 모친의 병환 때문에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한국 장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3·1운동 한 달 전인 1919년 2월 1일 선천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부터 양전백 홍성익 같은 인물이 윤 선교사의 집을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진다. 양전백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홍성익은 신성중학교 교사로 3·1운동 당시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다.

윤 선교사는 이들에게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한국이 독립하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한국 민족 스스로 일본의 압제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시위를 통해 해외에 알리면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회담에 채택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헌병대는 이 같은 정황을 바탕으로 윤 선교사를 1918년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지침을 받아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동한 인물로 지목한다. 윤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신성학교는 선천 지역 3·1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교직원·학생 210여명이 시위를 시작해 시가지로 몰려나갔다. 윤 선교사는 이때 자신의 집으로 피신해 오는 학생들을 감춰주고 보호했다. 1920년 미국 의회조사단이 한국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왔을 때는 독립운동가들의 진정서를 번역해 전달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외국인

187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윤 선교사는 1905년 한국에 왔다. 1909∼21년 선천 신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1911년 일본이 한국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했을 때는 날조 사실을 해외에 폭로해 국제 이슈로 만들었다.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고 1936년 1월 20일 결국 교장직에서 파면당하고 3월 21일 추방됐다. 이후 한국에 대한 연구서적을 발간하던 중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후일 초대 노동부 장관, 건국대 총장을 역임했던 신성학교 졸업생 고 이대위(서울 연동교회) 장로는 윤 선교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예수를 믿되 독립국의 사람이 돼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상을 전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궁중에서 끌고 나온 모세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