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 도시에 사는 직장인들의 하루는 대부분 비슷하다. 생기 잃은 얼굴로 일어나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종일 회사 일에 매달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계절의 변화는 달라지는 옷차림으로 감지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는 여유조차 사치이니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그런 우리를 따뜻하게 다독여준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길은 옳다고, 조금은 천천히 쉬어 가도 괜찮다고. “작고 조용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임순례(58) 감독은 이 영화와 꼭 닮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동명 일본만화를 바탕으로 한 ‘리틀 포레스트’는 자연의 참맛을 아는 소녀 혜원(김태리)의 사계절을 그린다. 대학에 입학하며 상경했으나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 혜원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죽마고우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야기다.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춰 재해석하는 게 관건이었다. 임 감독은 “일본 특유의 색이 워낙 강한 작품이어서 한국식으로 만드는 데 애를 먹었다. 특히 혜원의 엄마(문소리)가 어린 딸을 두고 홀로 떠나는 설정을 설득력 있게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면서 “각본 작업과 각색 과정에서 최대한 다듬어 자연스럽게 일본색을 지워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광을 담아내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꼬박 1년 동안 네 번의 크랭크인과 크랭크업을 반복했다. “계절에 따라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의 결이 차별화되길 바랐어요. 이를테면 겨울의 쨍한 느낌, 봄의 부드러움과 상큼함, 여름의 강렬함, 가을의 풍성함을 표현하고자 했죠.”
이 영화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음식이다. 극 중 혜원이 직접 기르고 수확한 식재료들로 만들어먹는 제철음식들이 절로 군침을 돌게 한다. 이를테면 겨울엔 눈 밑에 얼어있던 배추밑동으로 된장국을 끓이고, 봄엔 아카시아 꽃을 꺾어 아삭하게 튀기고, 여름엔 시원한 콩국수를 한 사발 말아내고, 가을엔 갓 딴 밤으로 달짝지근한 밤 조림을 만든다.
“이 영화에서 음식은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인 것 같아요. 엄마가 어린 혜원에게 요리를 해주거나 혜원이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먹는 장면은 사실 마음을 나누는 거거든요. ‘인스턴트식품에는 내 마음을 담을 수 없다’는 대사처럼 직접 만드는 음식에는 정성이 들어가죠. 그게 타인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이 영화는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원하는 삶을 택한 혜원, 대기업을 관두고 농사짓는 재하, ‘진상’ 상사를 응징하는 은숙의 모습까지. “어느 지인의 중학생 조카가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선 ‘판타지’란 얘기를 하더라고요. 친구들끼리 농사지어 음식을 해먹고 여유롭게 사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거죠. 왠지, 안타깝더군요.”
1996년 데뷔작 ‘세 친구’로 영화 연출을 시작한 임 감독은 대표적인 1세대 여성감독이다. 남성 중심의 영화판에서 굳건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 어느덧 영화계 ‘큰언니’가 된 그는 1일 출범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것”이라 머쓱해하면서도 의지어린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영화계에도 불어닥친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지지의 뜻을 전했다. 그는 “영화계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다 같이 진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를 통해 좋은 환경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겪어내야 한다”고 얘기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 “당신께 위로가 되었길” [인터뷰]
입력 2018-03-02 00:10 수정 2018-03-02 18:14